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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책을 만나다 - 엄마푸르나, 75세 노모와 함께 오른 인생의 산 <네팔 안나푸르나>



여행, 책을 만나다
<글과 사진 이희인>

엄마푸르나,
 
75세 노모와 함께 오른 인생의 산

찾아간 곳 네팔 안나푸르나
동행한 책 양귀자 <한계령>





‘앞에 가는 저 사람이 낯설다. 저이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해발 2,800m의 데우랄리 로지(lodge, 산장여관)를 나온 지 한 시간여. 아침부터 날은 화창하게 맑아서 주변에 둘러선 산악의 풍경이 가깝게 압도해 왔다. 
하루 이상 지속되 던 밀림 지대를 빠져나와 이제 슬슬 설산이 머리맡에 우쩍우쩍 올라오며 본격적으로 고 원 지대가 펼쳐지려 하는 때였다. 들어서니 산은 너무도 웅장하고 위대하여 그 언저리를 힘겹게 오르는 사람들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다.
양손에 등산 스틱을 쥐고 직사광선을 피하느라 목덜미까지 등산 모자 가리개를 늘어뜨 린 채 뒤뚱뒤뚱 돌계단을 오르는 노년의 여성. 그분이 내 어머니라는 것이 왜 이 순간 이 리 낯선 것일까? 어째서 세상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저분이 나의 어머니란 말인가? 
때때 로 나는 어머니의 존재가 주는 낯섦에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십여 개월 나를 몸 안에 품고 지내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세상에 빛을 보게 하신 어머니에게도 자 식에 대한 그런 낯섦이 있을까?
산행 나흘째. 이제까지 우리 모자는 잘 올라왔지만 그날은 확실히 긴장되는 날이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지만 해발 3,000m를 넘어서면서부터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고산병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두려운 장애물이다. 
평지보다 대기 속 산소의 양이 희박해지면서 몸에 여러 통증과 무기력을 일으키는 이 전대미문의 증세가 곧 어머니에 게 찾아올 터였다.
해발 4,000~5,000m의 산과 고갯길을 여러 번 경험해본 나는 고 산병 증세를 심하게 겪지 않은 편이라 별걱정을 하지 않지만, 75년 평생에 처음 해발3,000~4,000m를 경험하게 될 어머니의 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나도 어머니도 알 수 없었다.

1943년생, 내 어머니 최경자 여사가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키우며 흰머리와 주름을 늘려가다가 힘겨운 생의 한가운데서 처음 여행에 입문하게 된 것은 그녀가 회갑을 맞던 해였다. 
그 반년 전 아버지를 여읜 뒤, 나는 아버지 없는 세상의 말로 할 수 없는 허전함 과 아버지 생전에 함께 변변한 여행 한번 못 한 일을 섭섭해하며 울적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홀로 남은 어머니가 회갑을 맞은 걸 기회로 함께 동남아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 다. 
어머니가 바다 건너 땅을 디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뒤로 모자는 틈만 나면 함께하는 여행을 도모했다. 
휴일에 도시에 남아 있는 걸 끔찍해하는 아들이 노년으로 접어드는 어머니에게 여행을 제안하면 그녀는 별 주저함 없이 아들의 여행에 동행했다.





내륙의 수많은 산과 계곡, 절집을 다녔고 그러다 동해 끝 울릉 도와 독도, 남해의 끝인 제주와 마라도 그리고 서해의 먼 섬들인 굴업도며 볼음도까지를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칠순이 되던 해엔 칠순을 핑계로 중국의 북경과 장가계를 함께 여 행했고, 한두 해 뒤 일본의 간사이 지방도 여행했다. 
그녀의 여권 안쪽에도 여러 나라의 입국 허가 스탬프가 늘어만 갔다.
재작년엔 제주 애월읍에 작은 집을 얻어 가족이 함께 ‘제주 한 달 살기’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어느 하루, 한라산에서도 절경 중 절경이라는 영실 계곡을 따라 산의 중턱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칠순 넘은 어머니가 너무도 잘 오르시는 것 아닌가! 작년 가을 추석 연 휴엔 어머니와 베트남 북부의 사파 마을로 향했다. 
해발 3,143m의 판시판산 아래 자리 잡은 몽족, 자오족 등 소수민족의 마을과 가파른 다랭이논을 트레킹하는 코스로 각광받 았는데 
그곳에서도 어머니의 산행 실력은 함께 투어에 참가한 외국인들을 놀라게 할 정 도였다. 자, 유능한 트레커인 어머니를 모시고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때 어렴풋이
히말라야 트레킹 생각을 했다. ‘75세 어머니와 히말라야를 오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근두근 가슴이 뛰는, 꽤 매력적인 생각이었다.
6월 말부터 7, 8월은 네팔 히말라야가 우기로 접어들면서 종일 설산이 구름에 가려 볼 수 없기도 하거니와, 해발 2,500m 내외의 밀림지대에선 빗물과 함께 거머리가 출몰하는 통 에 사람들 발걸음이 가장 뜸한 시기다. 
그래도 6월 중순이면 종일은 아니지만 아침저녁 으로 설산도 볼 수 있고 거머리도 극성스럽지 않다고 했다. 
혹자는 너무 많은 등산객이 몰려 산이 몸살을 앓는 성수기보다 오히려 6월경에 호젓한 산행이 가능할 거라고도 했다. 
6월 16일, 모자는 네팔 카트만두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산행 시작 나흘 만 에 정상을 꿈꾸며 오르고 있었다.




해발 3,800여m에 위치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에서 점심을 드실 때만 해도 컨디션이 그럭저럭하던 어머니가 최종 목적지인 4,16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로 항 하는 길목에서 처음 주저앉으셨다.
머리나 목덜미가 아닌 가슴께가 아프다 하셨다. 고산 병이 찾아온 것이다. 이때까지 한 번도 자식 앞에서 ‘힘들다, 아프다’는 말을 한 적이 없 는 어머니였다. 정말 아프고 힘드신 거였다. 
발 빠른 사람은 1시간이면 올라갈 수 있다는 ABC가 저 언덕 너머에 있는데, 어머니는 또다시 채 열 걸음도 못 가 주저앉았다.

난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산행 처음부터 줄곧 찾아들던 자괴감이 이번엔 더 강하게 엄습했다.
동기야 어쨌든 간에 단 한 번의 실족이나 경미한 사고, 극심한 고산병 같은 것만으로도 이 산행은 비난받아 마땅할 터였다. 
그런데 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여기 에 온 것일까?
깊은 노년으로 접어드는 어머니에게 저 설산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거다. 
시인 이문재가<농담>이란 시에 적었듯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바로 그 마 음이었다. 
늘 혼자만 좋은 것 보고 다닌 것이 죄스러웠고 ‘저 설산 한번 보시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생각한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직 늙지 않은 것이고, 한라산도 사파 계곡도 멋지게 오르셨으니,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산인 히말라야 중턱에도 충분히 오르실 수 있 을 거라는 자신감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그 생각은 무모했던 것일까?
때마침 우리와 함께 아침에 데우랄리 로지를 출발했던 한국인 일행이 다가왔다. 
75세 어머니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줬던 분들인데 고산병에 맥을 못 추는 어머니를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 
그리곤 잘 들을지 모르겠다며 고산병 약을 한 알 꺼내줬다. 물과 함께 약을
드신 어머니. 잠시 숨을 고른 후 마지막 힘을 다해 양손의 스틱을 땅에 쿡 박으며 일어나 앞으로 나가셨다. 
어머니가 다시 내 앞에 섰다. 그때 다시 그 낯섦이 느껴졌다. 
‘저이는 누 구인가? 앞에 가는 저 노인이 왜 이토록 낯선 것일까.’
가장 좋아하는 소설집 중 하나인 <원미동 사람들>의 대미를 장식하는 단편 <한계령>을 특히 좋아한다. 
양희은 씨가 불러 많은 사랑을 받은 대중가요 <한계령>은 산에 오르거나 멀리 우뚝 선 산을 바라볼 때마다 이명처럼 귓가에 재생되는 곡이었다. 
‘저 산은 내게 우 지 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하며 시작하는 노래는 ‘우지 마라, 내려가라, 잊으라’라는 산의 속삭임을 들려주며 인생의 고단함과 허무를 표현한다. 
노래가 양귀자 의 소설 안에서 재생되는 장면은 압권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집안에서 가장 노릇을 하 며 대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평생을 바친 ‘큰오빠’의 삶을 회상하며 작가는 <한계령>의 노 래를 듣는다. 
나는 막막한 설산 고원 위에서 힘겹게 인생의 산을 오르는 어머니 뒷모습을 보며 노래가 귓가에 들려오는 이명을 체험했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 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양희은 노래 <한계령> 中


힘겹게 오르는 어머니 앞쪽으로 안개 속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건물이 서서히 드러 나기 시작했다. 
제야 힘이 나는 듯 어머니 걸음도 조금 더 가벼워 보였다. 그 많은 인 생의 산을 헤쳐 올라온 어머니는 이 요령부득의 설산도 천천히, 천천히 숨을 고르며 올랐다. 
문득 안나푸르나라는 이름 대신, 나는 이 산을 ‘엄마푸르나’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필자소개 : 이희인 공식적 직업은 카피라이터, 비공식적 직업은 여행가.
언제부턴가 자신의 카메라가 기가 막힌 풍경보다는 사람 들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좇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은 책으로는 <현자가 된 아이들>, <여행자의 독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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