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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책을 만나다 - 파리의 묘지로 읽은 유럽 근현대 문화 예술사 <프랑스 파리>

여행, 책을 만나다
글과 사진 이희인





파리의 묘지로 읽은 유럽 근현대 문화예술사

찾아간 곳 프랑스 파리
동행한 책 스탕달 <적과 흑>, 발자크 <고리오 영감>




세 번째 찾는 파리였으므로 나는 당연히 페르라세즈 묘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20여 년 전 첫 파리 여행에선 몽파르나스 묘지를 찾았고, 10여 년 전 두 번째 여행에선 몽마르트 묘지를 찾았다. 
세 번째로 그 도시에 간다면 틀림없이 페르라세즈를 찾아가 리라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종종 물었다.
사람들은 왜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세 미술관 등은 애써 찾아가면서 파리 도심에 있는 그 묘지들은 그냥 지나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 점에서 작가들의 책을 만나고,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 뒤마고나 카페 플로르 등은 들르면서 정작 현존했던 그들의 육신이 잠들어 있는 묘지엔 관심이 없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나는 그 묘지들이 도심의 웬만한 박물관이나 도서관, 서점 못지않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장소라 생각해왔다. 
그들이 쓴 책이나 작품 다음으로 우리가 그 현자들과 마 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그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가 아닐까?
단일 공동묘지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페르라세즈 묘지만한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두세 군데 지하철역을 통해 접근 할 수 있을 정도로 광활한 부지에 20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조성된 묘지. 이곳에 영면해 있는 사람들 이름만 열거해도 하나의 근현대 유럽문화사가 쓰일 정도겠으니 말이다.
1804년 나폴레옹 1세의 명에 의해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 처음 조성된 이 공동묘지는 그 때까지 교회 무덤에 묻힐 자격이 주어지지 않던 비기독교 신자나 무신론자, 자살한 사 람들까지 품어 안음으로써 파리지엥들에게 가장 친근한 무덤으로 자리 잡아 왔다. 
거기 에 프랑스인이 사랑한 극작가 몰리에르 등이 이곳에 이장되면서부터 유명 예술가들의 육신과 영혼이 잠드는 곳이 되었다.
이 묘지에 묻힌 사람들 면면만 봐도 이 묘지가 가지는 특별함을 가늠해볼 만하다. 
몰리에르, 다비드, 들라크루아, 쇼팽, 비제, 나다르, 발 자크, 오스카 와일드, 마르셀 프루스트, 아폴리네르, 폴 엘뤼아르, 이사도라 던컨, 마리 아 칼라스,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샤데크 헤다야트, 일마즈 귀니 등등. 어찌 이런 장소를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묘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누가 뭐래도 미국 출신의 록스타 짐 모리 슨의 무덤일 터다. 
1943년 미국에서 태어나 1971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록 밴드‘도어즈’의 리드싱어 짐 모리슨의 작은 무덤은 어찌나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는지 아예 무덤 전방 2, 3미터 앞에 철책이 세워져 있어 먼발치서만 묘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젊은 날 10여 년 넘게 다닌 단골 LP 바의 벽면에 누군가 찍은 짐 모리슨의 묘지 사진을 보고 나는 이곳을 오래전부터 그리워했다. 
LP 바에 붙은 그 사진엔 철책 따위는 없었 는데 모리슨에 대한 식지 않은 그리움이 철책을 세우게 한 듯했다. 
세상이 너무 따분하게 느껴질 때, 자멸하려는 듯 폭발하는 모리슨의 목소리는 이따금 찾아 듣게 된다. 
모리슨만큼이나 인기 있는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묘지는 페르라세즈 묘지 위쪽에 자리 잡고 있어 입구로부터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묘지 대리석 상판 위엔 누운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과 함께 참배객들이 두고 간 장미꽃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유곽 에서 태어난 고아인 데다 작은 체구에 볼품없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는 에디트 피아프. 그런데도 장 콕토며 이브 몽땅, 조르주 무스타키 등 당대 많은 사나이들에게 사랑받은 이 여성의 매력은 무엇일까? 
타계한 지도 50여 년이 훌쩍 넘은 사람의 묘지에 그날도 여전히 싱싱한 장미꽃이 놓인 까닭은 무엇일까? 
에디트 피아프가 사망한 날이 1963년 10월 11일이고,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는 장 콕토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날 또한 1963년 10 월 11일이다. 
피아프의 부음을 듣고 콕토가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몇 시간 뒤에 심장마 비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확인을 요한다. 
모든 예술의 정점에는 시가 있다고들 하고, 그중에서도 노래로 불릴 수 있는 시가 가장 위대한 시라고도 한다. 
사망한 지 40, 50여 년이 되어가는 오늘날에도 모리슨과 피아프의 묘지에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이유일 터다. 
그들뿐이랴. 한때 피아프의 연인이자 프랑스 영화의 아이콘이기도 했던 이브 몽땅도 여기 묻혀 있고, 불세출의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와 현대 무용의 전설인 이사도라 던컨의 유해도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그 망자들을 찾아서 44헥타르의 면적에 30만 개의 무덤이 있다는 너른 페르라세즈 묘역을 얼마나 찾아 헤매 다녔던가.
19세기부터 활발하게 이용된 페르라세즈 묘지의 초기 모습은 어땠을까? 1830년에 출간 된 스탕달의 <적과 흑>과 1835년 출간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는 페르라세즈의 당시 모습이 등장한다.





페르라세즈의 묘지에 갔을 때, 대단히 친절해 보이며 극히 자유주의적인 언사를 사용하 는 한 남자가 네 원수의 무덤을 가르쳐주겠다고 자진해서 쥘리엥에게 제안했다. 
교묘한 정략에 의해 그 무덤에는 비석도 세워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쥘리엥을 품에 껴안다시피 한 자유주의자와 헤어지고 나서 쥘리엥은 자기 시계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 스탕달 <적과 흑> 中


“가서 페르라세즈 묘지에 장지를 5년 계약으로 사고 성당과 장의사에게 3급 장례를 부탁 하게. 
만약 사위와 딸들이 자네가 쓴 비용을 내지 않겠다고 하면 묘비에 이렇게 새기도록 해. 
‘레스토 백작부인과 뉘싱겐 남작부인의 아버지인 고리오 씨, 두 대학생의 비용으로 묻혀 여기 잠들다’라고.” 
- 발자크 <고리오 영감> 中


시골 출신의 야심만만한 청년 쥘리엥 소렐이 파리에 와 이 묘지를 찾은 것이나, 두 딸의 출세에만 공을 쏟다가 딸들조차 외면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고리오 영감에게도 페르라세즈는 퍽 가까웠다. 
물론 이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남긴 작가들도 이들 묘지에 묻혔다.
 발자크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 고리오 영감처럼 페르라세즈에 묻혔지만, 매력적인 소설 주인공 쥘리엥 소렐을 탄생시킨 스탕달은 에밀 졸라, 에드가 드가, 베릴리오즈, 프랑 수아 트뤼포가 묻힌 몽마르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스탕달은 특히 이미 젊은 날에 유명 한 묘비명을 직접 작성해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밀라노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던, 본명이‘마리 앙리 벨’인 그의 묘비명과 관련해서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한다.


(스탕달은) 1821년부터 자신의 묘비에 뭐라고 적을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세상을 떠나기 무려 20여 년 전부터. 그는 ‘이곳에 잠들다’란 비문 대신 ‘밀라노 사람 앙리 벨, 그는 썼노라, 살았노라, 사랑했노라’를 선택했다. 
(중략) 하지만 세월이 지난 후 사람들은 스탕달이 정한 단어의 순서를 바꾸었다. 
‘썼노라, 살았노라, 사랑했노라’를 ‘썼노라, 사랑했노라, 살 았노라’로 바꾼 것이다. 
스탕달의 유언 집행자인 로맹 콜롱이 스탕달이 구상한 비문을 조 금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손쉽게 바꾸어버린 것이다.
- 미셸 슈나이더 <죽음을 그리다> 中


그 여행에서 에펠탑이나 개선문, 노트르담 성당 등은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그 장소들은 어쩐지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페르라세즈 묘지를 비롯해 몽마르 트와 몽파르나스의 묘지들은 다시 찾았다.
몽파르나스 묘지에도 여러 유명한 예술가, 지 식인들이 영면해 있다. 
다시 만난 사르트르와 보들레르, 연극인 베케트, 이오네스코의 묘지가 반가웠다.
대단한 여성들로 기억되는 시몬 드 보브와르와 마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예전에는 거기 없던, 그 사이에 유명을 달리 한 수전 손택 여사 등의 무덤 또한 참배객을 반겼다. 
사진가 만 레이,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맘씨 좋은 할아버지 필립 느와레, 에릭 로 메르 감독과 세르주 갱스부르 등의 묘 앞에서도 잠시 걸음을 멈추곤 했다.
묘지 세 곳을 도는 것만으로도 프랑스 아니, 유럽의 근현대 문화예술사를 찬찬히 읽고 섭렵한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제목이라 생각했던 시인 김남주의 유고시집 제목이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었던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건 그가 부르는 노래(작품)가 사라진다는 걸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랑의 노래를 남기고 간 이들은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들인 모양이다. 
그들의 육신은 멸해 세상에 없어도 그들의 노래는 우리 맘에 아직 살아 울리고 있다.


필자소개 이희인
공식적 직업은 카피라이터, 비공식적 직업은 여행가. 
언제부턴가 자신의 카메라가 기가 막힌 풍경보다는 사람 들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좇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은 책으로는 <현자가 된 아이들>, <여행자의 독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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