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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희의 도플갱어 영화 - 떠나기 직전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


임근희의 도플갱어 영화

임근희

 

 

떠나기 직전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

 

이니드는 잠시 멈춰 서서 도로 너머 벤치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매일 저곳에서 항상 똑같은 양복을 입고, 2년 전에 없어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서려는 찰나, 갑자기 버스가 나타나 할아버지 앞에 멈췄다

문이 열리 고, 할아버지는 버스와 함께 사라졌다.

고교 졸업 후 이니드는 방황하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하루 만에 잘렸다

단짝 친구 레베카와는 멀어졌고, 마흔 살의 순진한 남자친구 세이무어와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이니드는 친구, 애인을 만나 진심을 털어놓고 그들과의 관계를 차분히 정리하지만 여전히 앞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할아버지가 2년 만에 나타난 버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된 그녀는 다음 버스를 타고 홀연히 떠난다.

가끔 영화 <판타스틱 소녀 백서>의 마지막 장면을 찾아본다.

일상에 지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마다 찾아보는 것들 중 하나다




할아버지와 이니드가 차례로 버스를 타는 장 면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꼭 그 버스를 타고 떠나겠다는 할아버지의 굳은 마음과 오랜 기다림, 기다려본 적 없는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곧장 떠날 수 있는 가벼운 마음과 빠른 결정….

할아버지와 이니드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서로 크게 달라 보이는 두 마음과 태도 모두, 영화 내내 보이지 않다가 이니드가 어디론가 떠나기 직전에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금지된 사랑> 역시 <판타스틱 소녀 백서>처럼 마지막 장면이 아름다운 영화다.

이륙 직후 상승 중이라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로이드와 다이앤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

로이드는 옆 좌석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다이앤을 위해 온갖 이야기들을 꺼낸다

비행기 타는 걸 두려워하는 다이앤과 함께 영국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미국 시애틀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데, 뭔가 비행기에서부터 쉽지 않은 느낌이다

이래저래 부산한 둘 옆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느긋한 자세로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자기 다이앤이 로이드에게 키스한다

둘은 기대, 불안과 같은 온갖 감정들로 가득한 눈빛을 서로 주 고받고 고개를 든다




비행기 천장의 메시지등에 새겨져 있는안전벨트를 매세요!’라는 문구가 메시지등의 불빛 때문에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가 순항고도에 도달하자소리를 내며 꺼지는 메시지등을 바라보며, 그들은 서로를 꼭 껴안는다.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열정적인 러브 스토리인 <금지된 사랑> <판타스틱 소녀 백서>와 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영화다

마지막에 로이드와 다이앤이 비행기 안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풋풋해 보이지만 동시에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떠나는 것이 홀로 떠 나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많은 책임이 따른다는 걸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둘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손을 꼭 붙잡아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키스를 통해 말로는 전달되지 않는 감정을 서로에게 전하고, 서로를 꼭 껴안으며 두려움을 이겨낸다.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미지의 어디론가 떠날 때에, 둘이 함께 만들어온 사랑의 깊이가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 <금지된 사랑>의 마지막을 볼 때마다, 내 일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일상의 밑바닥에 의지, 기다림, 책임, 사랑처럼 내가 못 보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지 말이다

당장 어딘가로 떠나거나 송두리째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순 없지만 언젠가는 내 생에 숨어 있는 가치들을 확인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필자소개 임근희

이야기 애호가. 

그동안 영화, 음악, 소설 등등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스무 해 넘게 살아오다가, 그래도 무언가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 4년 전부터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얼마 전 <그들의 일: 자정의 시작> 이라는 소설을 냈다. 

그리고 직접 쓴 원안을 바탕으로 영화도 한 편 제작될 예정이다. 

현재 약간의 번아웃 상태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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