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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의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 - 아무에 대하여 <이탈리아 친퀘테레>

김소연의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
글과 사진 김소연






아무에 대하여

 

앉을 데가 있어서

앉는 게 아니라

 

앉고 싶으면

아무 데나 앉는 것에 대하여

 

살 데가 있어서

집을 얻는 게 아니라

 

살고 싶으면

아무 데나 짐을 푸는 것에 대하여

 

갈 데가 있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

 

떠나고 싶으면

아무 데나 가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말할 게 있어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에 대하여

Italy, Cinque Terre, 2014년




오늘은 유난히 서 있는 시간이 많았다

광주에 가야 하는데 기차표 예매를 하루 전에 했다가 입석 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간이 의자는 이미 누군가가 다 차지해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아무 데나 앉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러질 않아서 나도 그냥 서 있었다

여행지에서 아무 데나 철퍼덕 앉곤 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오늘처럼 누군가가 불러주지도 않았는 데 나는 여기저기 매일매일 쏘다녔다

오늘은 누 군가가 몇 번이며 꼭 내려오라고 불러주어서 찾아 간 것인데, 아무 이유가 없을 때보다 조금쯤 기차 를 타는 일이 즐거웠을 법도 한데, 그런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피곤함이 밀려오는 귀갓길에 버스 정류장에 서서 생각했다

오늘은 유난히 서 있는 시 간이 많았구나하고. ‘이런 날의 피곤함은 왜 달 지 않을까하고

아무래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 이유도 없는 것에 관해서만 홀가분해하는 사 람이 아닐까하고

그리고 시를 썼다

이유가 있을 때에는 우는 게 마땅할 때에도 울지 않는 나에 대하여

아무 이유가 없고 아무도 없는 데에서나 울고 싶어지는 것에 대하여.

- 2017 9 14

 

 

필자소개 김소연 시인

나조차 나를 낯설어하길 원하며 살고 있다.

어제까지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낯선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자주 여행을 떠난다.

틈만 나면 떠나고 틈을 내서 떠난다

일 년의 반 정도는 낯선 장소에서 살아간다

낯익었던 것들이 돌연 낯설어질 때에 적는 문장, 그것만이 시가 되거나 시에 가까워진다고 믿고 있다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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