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투데이

문화
count
2,881
여행, 책을 만나다 -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 책을 만나다
글과 사진 이희인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찾아간 곳 오스트리아 빈

동행한 책 플로리안 일리스 <1913년 세기의 여름>




우디 앨런 감독의 재기발랄한 상상과 통찰력이 빛나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나오기 이전부터, 나 역시도 19세기 후반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 혹은 20세기 초 도쿄나 서울 같은 곳으로 시간 여행을 하고 싶단 생각을 종종 했다

그 도시들이 지금처럼 거대 도시가 되기 이전엔 도심이라 해봐야 빤한 것이었고 그곳의 이름난 술집들엔 세상을 뒤집거나 소란스럽게 만들 궁리를 하던 미치광이, 작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을 터다.

박태원이나 최인훈 등이 서울을 배경으로 쓴 우리네 소설만 봐도, 작가들이 모여 토론하 고 술을 마시던 도심이라 해봐야 종로와 을지로, 광화문 일대, 넓게 봐야 동대문이나 남 대문 등 사대문 안쪽이 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도시들이 19세기 중후반부터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농촌과 시골의 인구들을 불러 모아 급격히 규모가 불어나면서 오늘날 과 같은 메트로폴리스가 된 것으로 안다.

시나리오 작가인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은 어느 밤 우연히 파리의 뒷골목에서 수상한 마차를 탔다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피카소, 달리 등 이 모여든 1920년대 파리의 한 술집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것

그가 평소 예술의황금시대라 여겼던 시간으로 여행하게 되고 거기서 만난 1920년대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 여주인공은 오히려 19세기 후반, 그러니까 고갱과 고흐, 로트렉 같은 예술가들이 활동하던 파리를 황금시대라 여기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난 마차는 그들을 19세기 파리로 데려다준다

영화의 메시지는 황금시대란 그 모든 시대이기도 하거니와 그러니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황금시대라는 얘기다.

나에게 시간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보 고 싶다

도스토옙스키 선생이 어디선가 도박에 빠져 있고, 우울한 차이콥스키라든가 보로딘, 무소륵스키 등을 네프스키대로 어느 길목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1910 년대의 일본 도쿄라면 어떨까

일본의 이름난 작가들은 물론이려니와 이광수와 김동인, 염상섭 같은 조선의 문학 청년들이 거리 어느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문학의 꿈을 펼쳐 나가는 모습을 우연히 엿보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엔 파리 외에도 또 하나의 유럽 문화의 수도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의 빈, 혹은 비엔나라 불리는 바로 그곳이다

오래 지속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휘황찬란 한 전성기에 힘입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이루며 유럽의 중심지로 우뚝 섰던 곳이 오스트리아가 아닌가

그 찬란한 황금기는 하이든,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음악가를 비롯하여 클림트, 에곤 쉴레와 같은 화가들, 프로이트며 츠바이크 같은 학자와 작가들을 키우고 불러 모았으리라

어디 그들뿐인가

아주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20세기 초 유럽의 역사를 재구성한 논픽션 <1913년 세기의 여름>의 앞부분엔 1913 1월의 일이라 상상되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의 만남도 일어났을지 모르는 것이다.

 

스탈린은 공원을 거닐면서 생각에 잠긴다. 날이 벌써 어두워지고 있다

그때 스탈린 쪽으로 또 다른 산보객이 다가온다

그는 스물세 살의 실패한 화가로, 아카데미 입학을 거 절당하고 지금은 멜데만슈트라세 27번지에 있는 남성쉼터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

는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큰 기회를 붙잡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

당시 두 사람의 지인들이 들려준 얘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쇤부룬 궁전 공원에 자주 산책하러 갔다고 하니 어쩌면 두 사람이 끝없는 공원을 산책하다가 마주쳐 한 번쯤 모자를 들어 올리며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플로리안 일리스 <1913년 세기의 여름>




1913년 한 해 동안 유럽, 특히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예술가, 치가, 학자 등의 기록들을 꼼꼼한 사료와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해 엮은 이 책은 딱딱하고 건조한 역사 서술을 넘어 풍부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픽션에 가깝게 읽히는 책은, 이후 20세기를 만들고 직조한 여러 정치 문화적 사건들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며 즐거운 지적 여행을 즐기게 해준다.

1913년이란 어떤 해인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이다

유럽 대륙에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벨 에포크’, 즉 아름다운 시절로 불리는 이즈음은 예술적으로는 모더니즘 운동이 활발하게 발흥하고 학문적으로는 마르크스, 니체에 이어 프로이트의 사상이 완성되어 일반화되던 즈음이 아니던가.

루브르 박물관의 얼굴인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해이기도 한 그해 열두 달 동안 있었던 무수하면서도 짤막한 에피소드로 엮은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면면만 봐도 그 자체로 즐거운 시간 여행이 되기에 충분하다

카프카, 루이 암스트롱, 릴케, 토마스 만, 프로이트, 루 살로메, 슈펭글러, 마르셀 프루스트, 클림트, 에곤 쉴레, 쇤베르크, 스탈린, 트로츠키, 부하린, 헤세, 슈바이처, 프란츠 요제프 황제(1년 뒤 암살당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같이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프란츠 마르크, 엘제 라스커쉴러, 카를 크라우스, 루트비히 키르히너, 에른스트 융거, 로비스 코린트, 알마 말러, 프란츠 베르펠, 슈니츨러 등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당대 예술과 정신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등장한다

시간 여행, 혹은 즐거운 지적 여행은 그해의 빈과 베 를린은 물론, 미국 뉴올리온스, 스위스 베른, 독일 뮌헨, 프랑크푸르트, 러시아 상트페테 르부르크, 체코 프라하, 프랑스 파리 등을 종횡무진하며 펼쳐진다

너무 정신없이 스쳐 지나가는 (시간) 여행의 풍경에 아찔한 느낌마저 갖게 되지만, 한 꼭지 한 꼭지가 맵시 있는 문체로 구성돼 있어 아껴 읽게 된다

무지막지한 지식의 폭격이자 읽고 공부해야 할 책들의 목록을 찬찬히 일러주는 친절한 길라잡이다.




겨울 초입에 찾은 두 번째 빈

오래전 한여름에 찾았을 때보다 스산한 느낌이 짙지만, 빈이 오랫동안 창조해온 도시의 활력과 분위기는 금세 우울한 분위기를 풍요롭고 화려 한 느낌으로 뒤바꿔 놓는다

모차르트의 화려한 결혼식과 쓸쓸한 장례식이 거행된 스테판 성당으로 향하는 대로에는 오래전 여름에도 만난 거리의 악사들이 그때와 비슷한 레 퍼토리의 곡들로 여행자를 반겨주었다

오스트리아 왕궁 정원에 서 있는 모차르트의 석상은 여전히 맵시 있게 여행자를 반겼고, 왕궁 담벼락 앞에 좌정한 괴테의 동상 역시 바쁜 여행자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그 저녁에 먹은 오스트리아식 커틀릿 요리인 슈니첼과 오스트리아 맥주도 지난 빈 여행의 추억을 되살려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달려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있다는 빈 중앙묘지. 지난 여행에선 그런 묘지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는데 그 묘지에 위대한 음악가들이 한 곳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한참 외곽으로 나가자 전차 두세 정거장이 서는 규모의 거대한 빈 중앙묘지에 도착했다

묘지의 정문인 곳에서 지도를 보고 찾아가니 음악가들의 묘원(墓園)이 중앙대로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거기 아주 자그만 광장에 그분들이 계셨다

중앙에 (묘지 대신) 세워진 모차르트 기념비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둘러선 대 음악가의 묘지들

베토벤과 (베토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 슈베르트 그리고 요한 시트라우스와 브람스의 묘지들이

그 크지 않은 공간에서 내내 떠 나지 않고 서성였다

귓가엔 그분들이 인류에게 남긴 웅혼하고 우수에 찬 음악들이 내내 재생되었다

그들의 육신이 잠든 묘지 앞에서 환청으로 듣는 그들의 음악

이거야말 로 시간 여행이 아닌가!

어떤 소설인지 기억이 안나지만, 소설 속 화자에게 타임머신, 즉 시간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두 가지를 꼭 확인하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에 가서 그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확인하고 싶다 했고, 다른 하나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 넘어가 셰익스피어란 극작가가 실제로 존재한 사람인지, 또 정말 그가 그 작품들을 다 썼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어떤가

당신 앞에 타임머신이나 <미드나잇 인 파리>의 수상한 마차가 멈춰 선다면 당신은 어느 시대, 어떤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으신지?

 



필자소개 이희인

공식적 직업은 카피라이터

비공식적 직업은 여행가.

언제부턴가 자신의 카메라가 기가 막힌 풍경보다는 사람들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좇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은 책으로는 <현자가 된 아이들>, <여행자의 독서> 등이 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