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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너머의 물건들 - 먼 곳에 놓고 온 책장

물건 너머의 물건들

글과 사진 전진우


먼 곳에 놓고 온 책장





그녀의 집은 내가 사는 곳에서 아주 멀리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집, 아이들의 사진을 책에서 봤지만 책 속의 세계가 그렇듯 그 안에는 분명 내가 없었다.
지금 책상 앞에서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는 사진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되었다.
보름 정도의 여행이 어느새 끝나고 나는 다시 책 속 의 사진을 바라보던 그때 그 책상에 앉아 있다.
사진 속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떤지, 떼쓰는 소리는 어떤지 이제 알고 있다.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목소리도 꽤나 선명히 기억할 수 있다.
나무로 된 하늘색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양이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냄비와 소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나는 알고 있다.
잠깐 머물렀던, 이제는 내가 사라진 자리가 제 모습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 놓고 온 물건이 하나 있다.
너무 무거워서 한국에서부터 가져갈 수는 없었던 것.
하지만 물건의 일부는 오래전부터 이미 내 몸 안에 담겨 있었던 것.
어떤 물건은 여러 장소에서, 여러 마음들이 한 자리, 한 시간에 모였을 때 만들어진다.





 재료 1 한 사람의 일상

프랑스 서쪽 마을에 살고 있는 마고 씨와는 원래 알던 사이가 아니었다.
이 책 <해피 투데이>에서 읽은 이야기가 그녀에 관한 전부였다.
어느 날 휴가 계획을 짜던 내가 보낸 짧은 메일 한 통은,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잠시 잊어버리게 할 만큼, 몇 초 만에 전해졌다.
파리로 가는 항공편을 예약하고 나서 여행을 시작하기 전 몇 달 동안 우리는 몇 차례 안부를 서로 전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냈다.
그녀는 새로 이사한 집을 가꾸며 아이들과 함께 작은 즐거움들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챙겨갈 물건이 없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가 부탁한 것이 조각용 지우개, 모기장, 봉숭아 꽃씨였기에 그렇게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즈음 나는 여느 때처럼 가구 만 드는 일을 해나갔는데, 긴 연휴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더 분주했다.
그 바쁜 와중에 회사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는 모르는 걸 물어보느라 옆 사람을 귀찮게 하는 시간보다 혼자 열중해서 하루치 일을 해나가는 날이 많아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가구들은 선임들이 만드는 속도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게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물론 나는 그들이 하지 않는 실수를 종종 하곤 했다.
“진우 씨와 여자 친구분이 함께 오면 할 일이 많아요.”
마고 씨는 그런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게 신세 지러 가는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는 그녀가 말한 물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준비하면서 따로 말하지 않은 것들도 가방에 미리 넣어두었다.
“진우 씨는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죠? 책에서 봐서 알고 있어요.”
마고 씨가 메일에 그런 말도 적어 보냈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배운 손기술들도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재료 2 다른 한 사람의 습관

파리에 도착해 이틀 정도 지낸 뒤 여자친구와 나는 마고 씨가 사는 피프리악(Pipriac) 까지 이동했다.
무거운 가방을 길에 세워놓고 몇 분을 기다리자 마고 씨의 남편인 프랑소와가 마중을 나왔다.
“안녕!” 한국어로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걸 즐거움으로 여기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우리에게 인사했다.
커다란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들을 밟고 거름 냄새에 놀라 창문을 닫으며 우리는 아이들과 마고 씨가 기다리는 집에 도착했다.
그새 그리워진 한국말로 서로 안부를 묻고 저녁으로 갓 구운 파이를 먹는 동안 아이들은 갑자기 방으로 숨거나 괜히 엄마를 크게 불렀다.
가끔 강아지처럼 나를 곁눈질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걸 발견하는게 좋았다.
서로의 이름을 몇 번씩 연습해보던 그 밤에 각자 무엇을 확인한 걸까?
우리는 다음 날 아침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벌써 친한 사이가 돼 있었다.
첫째인 다와는 우리에게 집 곳곳을 안내해주었다.
귓속말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
다와가 따로 말해주진 않았지만, 나는 마고씨의 남편 프랑소와의 작업실에 가장 먼저 눈이 갔다.
톱과 망치, 클램프가 달린 작업대. 벽을 뚫거나 나무를 자르는 전동 공구들도 보였다.
대부분 그의 아버지가 쓰던 것들을 정리해놓은 것이고 몇몇은 남들이 더 이상 쓰지 않는 것들을 주워놓은 것처럼 보였다.
길이와 두께가 각기 다른 나무들도 꽤 있었다.
거기에 있다 보면 프랑소와의 손과 얼굴이 금세 떠올랐다.
나는 그 공간에서 느껴지던 차분한 활기가 신기하고 좋았다.





 재료 3 작은 바람들

“이거!” 아이들은 자꾸만 책을 가져와서 읽어달라고 졸랐다.
한국말을 하면 전부 알아듣는 ‘다와’와 그림을 보고 무언지 알아맞히기 좋아하는 둘째 ‘아이와’가 번갈아 가며책을 들고 왔다.
나는 자꾸 도망쳤는데, 그러다가 작은 방에 아직 못다 정리한 책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책장을 만들까요?” 내가 먼저 물어봤는지 아니면 마고 씨가 부탁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책장을 만드는 일이 지금 내가 있는 장소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다.
나는 그동안 어슬렁거리던 프랑소와의 작업실 문을 열어 안으로 햇살이 들어오게 했다.
“무엇이든 써도 돼.” 프랑소와가 내게 말했다.
작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그동안 미뤄두었던 조명 작업도 서둘러 해주었다.
구부러진 톱과 모양이 다른 나사들뿐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부족함 없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아이들이 가끔씩 찾아와서 웃으며 도망가고 고양이 ‘와와’가 햇볕을 따라 옮겨 앉는 걸 지켜보면서 작업할 수 있었으니까 그 환경은 오히려 ‘넘치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만 하기 싫어도 일을 멈추고 담배를 피우거나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틀 뒤 완성된 책장을 벽면에 고정하고 나서 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다와를 빤히 쳐다봤다.
“안 예뻐. 근데 커!” 다와는 내가 그 집에서 떠나오는 날까지 그 말을 열 번도 넘게 반복했다.
“그래.” 나는 그 말 말고는 해줄 말이 없었다.
다와에게 물어보지 않고 내가 만들던 방식대로 만들었으니까. 뒤늦게 미안한 마음도 조금 들었다.
그래도 그날 저녁 나는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책장에 책을 꽂아 넣고 있던 다와의 등을 보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다와는 책을 꽂아 넣을 때마다 불어로 된 제목을 하나하나 조용히 읽었는데, 그건 멀리서 들어도 귓속말 같은 신기한 목소리였다.
예쁘지 않아도 크기는 크니까, 그 책장 위에는 앞으로 한국어와 불어가 섞인 귓속말이 차곡차곡 쌓일 일만 남아 있었다.








필자소개 전진우
대학에서 체육과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졸업 후 2년간 에디터 생활을 했다.
오래 지냈던 경기도 의정부에 친구와 가족이 모두 있어서 항상 생각이 그리로 흐르는 편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체험한 주변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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