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시코쿠 순례의 마지막 코스인 카가와현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와중에 영진한테 연락이 왔다.
둘 다 사회 초년생이라 바쁘게 지내느라 한참 연락이 뜸했던, 내 고등학교 단짝 친구는 다짜고짜 우리 엄마 안부부터 묻는다.
여행 계획을 이야기했더니, 전화를 끊기도 전에 그때에 맞춰 휴가를 내겠단다.
엄마 배낭 들어주러 와야겠다며 우리 비행기 티켓도 끊기 전에 영진이 먼저 발권을 해버렸다.
나는 영진을 말릴 수가 없다.
4년 전에도 그랬다.
엄마와 처음으로 걷기 여행을 시작했을 때, 네덜란드에서 유학 중이던 영진이 배낭을 메고 스페인으로 찾아온 것이다.
30년을 가까이 같이 산 우리 엄마와의 여행도 어려운데, 친구 엄마와의 여행을 자기 발로 나선 친구를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셋이 걷다가, 엄마의 느린 걸음이 답답했는지 고민하는 그를 부추겨 먼저 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내 머리 위에 있는 그 녀석은 며칠 후에 길을 거꾸로 걸어와서 우리와 다시 만났다.
4년이 지났다.
엄마랑 여행하다 곰살맞은 영진을 닮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엄마한테만 그런게 아니었다.
12년 전, 고등학교 때 유럽 배낭여행을 나서던 내게 그가 내밀었던 MP3 플레이어를 잊지 못한다.
여행 중 생일날 꼭 틀어보라며 아침, 점심, 저녁, 밤 폴더를 만들어 선곡해줬던 것.
그 음악들과 함께한 유럽여행은 지금까지도 뮤지컬 영화같이 마음에 남았다.
엄마랑 친구사이에서 또 뻘쭘할 상상만 하다가 문득 그 노래 들이 듣고 싶어졌다.
그 리스트를 기억하냐고 영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12년 전 선곡표 대신 이번 여행을 위한 믹스테이프 중에 한 곡을 선공개하겠단다.
내가 졌다.
그가 보낸 노래 를 듣다가 우리 여행의 유일무이한 게스트로, 또다시 영진을 두 팔 벌려 환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