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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부엌에서 쓰는 칼럼 - 아이돌 산업의 윤리학

장강명의 부엌에서 쓰는 칼럼

장강명




아이돌 산업의 윤리학


연예인과 대중문화가 미풍양속을 어지럽히니 규제해야 한다던 어른들을 한심하게 여겼던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내가 바로 그런 꼰대가 되었다.
2009년 ‘슈퍼스타 K’가 나와 인기를 모으고 이후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 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들이 기획사 연습생을 대상으로 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나서는 보기가 몹시 꺼림칙해졌다.
이전의 오디션 참가자들은 일반인이었고, 오디션은 그들 삶에 덤으로 생긴, 선물 같은 이벤트였다.
하지만 연습생은 다르지 않은가.
회사에 소속된 일종의 인턴 아닌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지금 시점에서 인생을 전부 바쳐 데뷔를 준비하지 않는가.
그런데 바로 그 목표를 상으로 내걸고 공개경쟁을 시켜도 되나?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나?
아이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티브이를 보는 동안 보험 많이 팔아오면 정직원 시켜주겠다고 인턴들을 꾀는 악덕 기업, 유혈 낭자한 콜로세움에서 환호하는 로마 시민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그런 ‘서바이벌 오디션’의 결승전을 볼 때는, 무대 아래 앰뷸런스가 대기 중인지 궁금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오들오들 떠는 아이들의 건강이 진심으로 염려스러웠다.
어지간한 어른도 저 정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제대로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다.
요즘은 중소 기획사를 찾아가 연습생을 발굴하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군소 기획사 대표들이 “아이들을 제대로 지원 못해 미안하다”며 눈물 흘리는 모습에 짠하기도 했지만 화도 났다.
왜 남의 인생으로 도박을 하나.
그러다 인기를 얻지 못한 아이돌을 재발견하는 프로그램을 보니 업계 전체가 무책임한 노름판처럼 보였다.
십 대를 다 바쳤는데 운이 따르지 않은 아이들은 도대체 이후에 어떻게 되는 건가?
연습생 발굴 또는 아이돌 재발견 프로젝트의 취지는 참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개별 프로젝트 이상의 어떤 구조적 개입이필요한 시점 아닐까.
3년 전 한 걸그룹이 탄 차량이 빗길에 과속하다 사고를 냈고, 젊은이 두 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 업계 관행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근로감독기관이 아이돌의 스케줄이 어떠한지, 휴일에는 제대로 쉬는지 살피나?
산업재해가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업무환경이고 연습생 중엔 미성년자도 많은데.
팬들은 어떤가.
팬덤 문화는 외부인들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복잡다단하게 진화 중인 것 같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 형성돼 이미 정치와 사회 영역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팬덤 스스로도 그걸 자각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실험하는 동시에 반성과 혁신도 고민하는 걸로 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상당히 퍼진 어떤 생각들, 팬덤이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행동들은 분명 우려스럽다.
하나는 ‘사랑하니까 괜찮다’라는 생각이다.
몇몇 어린 팬들은 뜨겁고 순수한 열정으로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저지른다.
그 대상은 나의 아이돌이 되기도 하고, 경쟁 아이돌이 되기도 하고, 관계없는 시민이 되기도 하고, 팬 자신이 되기도 한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논리를 내미는 팬도 있다.
자신들은 유사연애라는 비싼 상품을 사고있다, 그러니 아이돌이 이성교제를 하면 안 된다, 사귀더라도 몰래 해야 한다는 글을 접하고 어안이 벙벙해진 적이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는 건가?
아이돌도 사람이다.
인형도, 로봇도, 반신(半神)도, 캐릭터도 아니다.
다이어트를 오래 하면 몸이 상하고 악플에 시달리면 공황장애를 앓는다.
우리에게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하며, 물건이나 상품이 되어선 안 된다’는 도덕규범이 있다.
나는 최근 아이돌 산업의 생산과 소비 행태가 이 규범을 공공연히 허물고 있지 않나 걱정스럽다.
이런 훼손과 타락은 우리가 막으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소년소녀들이 무대 뒤에서 흘리는 눈물도 줄일 수 있다.
꼰대스러워도 도리 없다.
아무리 멋지고 눈부신 것들 앞에서도, 우리가 쌓아온 귀한 약속들을 놓지 말자.
인권과 노동에 관한 법적, 도덕적 합의들 말이다.





필자소개 장강명
공대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들어갔다가 그만두고 나와 신문기자가 되었다.
신문사에서 11년 일하다 그만두고 나와 소설가가 되었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했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 ‘월급사실주의’라고 설명한다.
장편소설 〈표백〉,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우리의 소원은 전쟁〉, 소설집 〈뤼미에르 피플〉,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
행〉 등을 썼다.
주로 부엌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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