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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풍常회 - 중모리장단으로

무풍常회 일기

글과 사진 이후



중모리장단으로


1년 전 이맘때, 남편이 둥근 상을 만들어주었다.
결혼 초기부터 둥근 밥상을 갖고 싶어 노래를 불렀지만 매번 다른 모양과 무게의 네모 상만 여럿 생겨났다.
목공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냥 톱으로 둥글게 자르면 되지 않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몇 년 곁눈질 해보니 대목과 소목에 쓰이는 공구는 엄청난 차이가 있더라.
여하튼 남편은 작년에서야 원을 재단할 수 있는 톱을 들이게 되었기에 둥근 상을 만들어준 것이다.




새해 첫 달부터 기분 좋은 선물.
얻어온 고재로 만들어 무게가 제법 있었지만 마당에 놓고 반들반들 기름을 먹이니 진한 나무색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다.
마침 집에서 손뜨개 모임을 하고 있었던지라 넉넉한 다과상으로 쓰기에 맞춤으로 좋았다.
남편은 며칠 사용해보면서 거슬리는 부분을 하나씩 고쳤다.
지름에 비해 좀 짧아 보였던 다리는 접이식으로, 그러다 다시 튼튼한 고정식으로 수정이 되었고, 상판을 고정했던 못도 나무심으로 바꿨다.
표면이 매끄럽지 않아 행주 사용이 불편했지만 빵이나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미니 빗자루로 쓸어내는 것도 재미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쓰다 보면 언젠가는 맨들맨들해지지 않겠나.
그렇게 밥상 하나 정 들일 때만 하더라도 얼마나 혹독한 한 해를 만나게 될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이 혹독함의 씨앗이 그 전해, 그 전전해에 만들어졌던 것인지는 더욱더 알지 못했지.




둥글게 여럿이, 또는 나와 마주 앉기

둥근 상은 여럿이 둘러앉기 좋은 상이다.
자연스럽게 ‘끼어’ 앉을 수 있어서 같은 공간, 같은 인원이라도 네모난 상보다 많이 앉을 수 있더라.
이런 경험이 있다 보니 이 넓은 상 앞에 날마다 혼자, 또는 둘이 앉는 일이 생각보다 더 쓸쓸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작년에는 매달 이 ‘무풍常회 일기’를 쓰는 일이 참 버거웠다.
글 한 줄이 내 생활 한 줄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기에 더 그랬다.
겨우겨우 마감을 넘기다가 이번 달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손을 든 적도 있다.
하지만 쓰지 않을 수도, 허풍을 떨 수도 없었다.
늘 우직하게 기다려주는 <해피투데이> 편집부가 만들어준, 도망갈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기에.
오롯이 나와 마주 앉아, 있는 그대로 쓰는 것.
장례식장에서 울면서 밥을 먹듯이 꾸역꾸역 쓰는 길밖에는.




애초에 이 글은 내 시골 생활의 낭만이 부러움이 되지 않기를, 내 결핍이 허영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시골 생활의 만족과 불편을 가감 없이 쓰고 싶었기에 잘 살지 못 하는 것도, 추레한 것도 가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인생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니 글쓰기도 오리무중, 두터운 안개에 휩싸였던 것이다.
지난해를 나와 함께 시작한 둥근 밥상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하니 아득하다.
대책 없이 떠났던 여행, 여행에서 만났던 더 막막한 인생들, 무작정 시작했던 대청소, 물건을 줄이면서 얻은 노하우들, 상여 나가듯 실려간 피아노까지….
그 시간들을 함께 넘어야 했던 남편과 아이는 또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지….




생로병사 그리고 춘하추동

얼마 전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생로병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죽음에 대해 생각이 깊어진 그는 어느 날 문득 의아했단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중에 이제껏 너무 생에 대해서만 집중해온 것이 아닐까 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네 가지 고통과는 조금 방향이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의 관심은 너무 사는 데만 있다는 것이다.
깊이 공감했다.
자연과 가까운 환경에서 춘하추동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사실 나는 해마다 작은 생로병사를 겪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일하기 좋은 계절에 틈틈이 땔감을 마련하듯이, 가뭄과 척박에 잎이 마르지 않도록 이른 아침 물을 대듯이 죽음과 병에 대해 덤덤히 대비해본 적 없었다.
꽃 피워 열매 맺은 작물이 미련 없이 스러지는, 무수한 생로병사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늙음을 얼마나 체화했을까.
올해는 이 부분을 마음 써서 보리라.
아울러 이 생각에 기대어 내 식대로 춘첩을 한번 써보려 한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대신 중모리장단을.
박자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우리 음악을 연구한 큰언니에게 중모리장단에 대해 들었는데, 이게 그렇게 멋지더라.




우리 장단의 꽃이라고 하는 중모리장단은 ‘덩 덕/쿵덕더덕덕/쿵쿵덕/쿵 덕더덕덕’을 기본으로 수많은 변형이 있다.
1년 열두 달처럼 열두 박으로 셋씩 묶어 기경결해(起景結解)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하면 ‘밀고, 달고, 맺고, 풀고’라고 한단다.
일단 장단을 시작했으면 화려하게 놀고, 절정에서 맺은 다음 다시 풀어주는 박자인 중모리장단.
또다시 봄, 죽음 뒤에 돌아온 생이다.
실수로 내디딘 걸음, 넘어진 자리 모두 그대로지만 어떻게든 추슬러 가야 한다.
밀고 달고 놀았으니 맺고 풀어 제자리로 와야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
이런 박자 맞춰 살다 보면 조금씩 이치에 맞게 살게 되지 않을까.






필자소개 이후
사무실에서 버려진 화분들을 모아 기르다가 그만 시골로 이사했다.
몇 군데의 마을을 거쳐 지금은 전북 무주에 살고 있다.
무점포가게 <무풍常회>를 운영하며 여름에는 직접 재배한 유기농 옥수수를, 겨울에는 앞집 할머니의 청국장 등을 판다.
시간이 날 땐 손뜨개를 하며, 살면서 배운 것을 글로 옮기고 있다. mu_pung.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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