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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의 매직 라이프 - 씨앗여행

마고의 매직 라이프

글과 사진 마고




씨앗여행




심지도 않았는데 우리에게 찾아온 식물들이나 해를 거듭하며 함께하는 식물들은 특별대우를 해준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것들에게는 이름도 지어준다.
‘올해도 잘 먹을게’ 하고 약간은 무서운 인사를 덧붙여가면서 말이다.
심는 씨앗들이 모두 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매해 봄마다 씨앗이 몇 개씩 들어 있는 씨앗 봉투와 모종을 사는 것도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기는 하다.
가게에서 1유로를 내면 그 가격에 맞는 몇 개의 씨앗을 살 수가 있다.
그렇게 가게의 계산법에 익숙한 내게 자연은 항상 부족하다 느끼던 장바구니와 마음까지 한가득 채워준다.
돈을 내는 간단한 행위 대신 직접 촉수를 세워서 찾아내고, 캐내고, 다듬어서 먹으려면 여러 가지 과정이 더해지기 때문에 더 번거롭기는 하지만 넉넉함으로 따지면 비교할 수가 없다.




프랑소와즈 아줌마의 진귀한 씨앗은행

길에서 썩어가는 밤과 도토리와 자두와 체리를 보면서 그리고 유한락스가 뿌려져 버려지는 대형마트의 팔다 남은 음식들을 보면서, 우리가 자연을 누리지 못하고 얼마나 시스템 안에 가둬진 채 살아가는지를 느낄 수 있다.
만약 시장에서 매주 아이들이 좋아하는 체리를 한 봉지에 만 원씩 사가지고 와서 먹는다고 치자.
아이들의 먹성에 체리는 항상 부족할 것이고 빨리 먹지 않으면 금세 뭉그러져버릴 것이다.
생활비에 쪼들리는 엄마들이라면 아이들 간식도 맘 편히 주지 못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집 앞 나무에 달린 체리는 먹어도 먹어도 쉽게 동이 나지 않고 한철 동안 싱싱한 체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끓여서 잼을 만들어 병에 보관하는 등 부지런히 움직이면 1년 내내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먹을 수도 있다.
씨앗은 더욱더 그렇다.
꽃이 진 후 하나의 씨앗에서 탄생했던 그 꽃은 수많은 씨앗을 남기고 간다.
봉투에 들어 있는 씨앗을 돈 주고 살 때와는 전혀 다른 만족감이 있고 마음에 여유까지 생긴다.
프랑소와즈 아줌마네 집에서 아줌마의 탁자 옆에 가지런히 정리된 수많은 봉투의 씨앗들을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인도의 한 마을에서 농부들이 운영하는 씨앗은행이 떠올랐다.




허름하고 어두운 헛간이었지만 토종 씨앗들이 잘 구분돼 있어 보관하기에 충분히 근사해 보였다.
씨앗은행은 돈이 아니라 씨앗과 다른 씨앗이 교환되면서 운영이 됐다.
‘3년을 넘긴 오래된 씨앗은 발아율이 낮다고 하지만, 천 년이 넘은 연꽃 씨앗이 싹을 틔운 기적처럼 자연에서 이렇다 하는 한 가지 답을 찾기는 어렵다’고 아줌마는 항상 내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기적, 마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아줌마의 씨앗은행은 돈을 쓰지 않는 평화로운 은행이다.
세계 최대 종자기업인 <몬산토>같은 기업들이 ‘F1씨앗(교배를 통해 만들어진 잡종씨앗으로 1대만 존재하고 후손을 볼 수 없는 빈 씨앗)’을 팔아 매해 씨앗을 다시 사야 하는 일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요즘에는 토종씨앗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아줌마처럼 이렇게라도 씨앗의 대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든다면 대체 우리의 먹거리들은 어떻게 될까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씨앗들을 나눠 갖는 씨앗 교환의 날

매주 화요일이면 프랑소와즈 아줌마와 나는 켈넉, 마쑤드네 집에서 열리는 블랙마켓에 간다.
초저녁 시간이 되어서 로자가 만들어온 타르트를 맛있게 먹으며 아줌마와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직접 키운 식재료가 주인 마켓이기에 그곳에서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정원일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예전에 아줌마가 키운 야채들과 모종들을 한가득 가지고 마켓에서 사람들과 나눈 적이 있었던 터라 사람들은 아줌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아줌마는 우리에게 씨앗과 가지를 교환하라는 아이디어를 주었다.
아줌마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곧 만나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10월 초 우리는 블랙마켓에서 씨앗 교환의 날을 가졌다.
그리 많지는 않은,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씨앗을 가지고 왔지만 씨앗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여러 해를 사는 생명력이 강한 야생딸기, 아기 레몬나무, 프랑부아즈 가지 등 정원에 심을 많은 씨앗들을 다들 챙겨갈 수 있었다.
그렇게 씨앗과 씨앗이 돈이 아닌 손과 손을 타고 여행을계속하는, 두고두고 오랫동안 씨앗들의 자손이 번져나가는 세상을 꿈꾸는 마음들이 만나면서 씨앗은 날개를 달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비록 실패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사회일지라도, 유전자가 변형된 음식들이 우리의 배를 채운다고 해도, 이렇게 작게나마 희망의 움직임이 시작될 수 있다.
프랑소와즈 아줌마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같은 과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해 평생 주부로 살았다.
수학을 배운 것이 삶에서 그리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모로코에서 남편과 수학 선생을 하면서 남편의 군대 징집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좋은 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말이 주부지 막노동자의 삶이나 다름없다.
오죽 육체노동을 많이 했으면 육십 대 노인의 팔이 근육질 마돈나처럼 울룩불룩하고 손 마디마디는 흙이 배어 손이 흙처럼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아줌마는 어렸을 때 남들은 세 살이면 다니기 시작하는 학교를 여덟 살에 들어가면서 집에서 정원일과 집안일들을 배워 부모님을 도왔다고 한다.
정리와 청소, 야채를 키워 먹거나 요리를 하고 집 안을 수리하는 등 삶의 기본이 되는 일들을 그때 다 배웠다고 한다.




작은 마법을 일으키는 신비한 존재들

프랑소와즈 아줌마네 집을 지나다가 그녀가 뭔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뭘 그렇게 열심히 보냐”며 아줌마의 텃밭으로 들어갔다.
아줌마는 벌들이 일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난 티브이는 오래 못 보는데 이런 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된다”고 했다.
아줌마는 시골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길고 가녀린 거미를 키운적이 있는데 글쎄 3년이나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름은 ‘집시’라고 지어줬다고.
아줌마는 본인의 실수로 죽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하며, 그래서 거미가 얼마나 사는지는 정확히 모른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러던 아줌마가 어느 날은 무슨 작은 알들을 찾아서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얼마 지나니 깨알 같이 작은 알들에서 나온 까만 애벌레들이 통 안에서 우글거리고 있었다.
애벌레의 뾰족뾰족한 가시가 무서워서 근처도 안 가고 있는데 프랑소와즈 아줌마가 통을 열더니 애벌레를 손으로 만졌고 아이들도 덩달아 손에 올려
놓고는 좋아했다.
아줌마는 “이 애벌레들은 가시넝쿨 잎을 먹으니 지나가다가 통이 비어 있으면 가시넝쿨 잎을 채워달라”는 임무를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조심조심 넝쿨 잎을 채워 넣고 나비가 되기를 기다렸다.
물론 바깥 세상보다 통 안의 세상은 좁고 답답했을 수도 있지만 넝쿨 잎을 줄기 몇 부분만 남기고 거의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먹성 좋은 애벌레들은 쑥쑥 자랐다.
아줌마는 곤충에 관한 책을 가지고 나와 우리와 함께 통 안의 애벌레와 가장 닮은 녀석을 찾았다.
다 비슷비슷해 보여 긴가민가했는데 예리한 아줌마는 잘도 찾았다.
갈색의 근사한 나비였다.
애벌레들은 누에고치가 되고 또 여러 날을 지나 우리가 늦잠을 잔 어느 날 아침 근사한 나비가 돼 통 안을 벗어나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아이들은 아줌마의 책에서 본 나비와 흡사하게 생긴 나비를 볼 때마다 자기가 쓰다듬어준 애벌레일 거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작은 마법을 일으키는 신비한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고 작은 알에서 나온 나비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씨앗들이 말해준다.



필자소개 마고
레게 음악 뮤지션인 프랑스인 남편, 다람쥐처럼 온종일 뛰어다니는 아이 셋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마고는, 낮에는 살림을 하고, 밤에는 사계절의 변화와 닮은 그림을 그린다.
현재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연이 주는 무구한 은혜를 껴안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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