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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석의 부엉이 극장 - 스모크: 순결한 거짓말

전영석의 부엉이 극장

전영석




스모크: 순결한 거짓말


“나는 생선 대가리 좋아해.”
몸통 살을 발라 내 밥에 얹어주며 엄마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는 닭다리를 싫어한다며 늘 닭모가지만 쪽쪽 빨았다.
나는 ‘대가리가 굵어지기’ 전까지 정말 (멍청하게도!) 그런 줄 알았다.
<나 홀로 집에>나 <러브 액츄얼리>도 좋지만, 크리스마스나 연말이 되면 나는 골초의 금단 현상처럼 <스모크>(1995)가 간절해진다.
영화 <스모크>는 폴 오스터의 크리스마스용 단편 소설에서 시작됐다.
폴 오스터는 점심 한 끼 값에 담배 가게 친구 오기 렌에게 산 이야기로 소설을 쓴다.
우연히 그 소설을 읽고 매료된 웨인 왕 감독이 흑인 청년 라시드와 그의 외팔이 생부사이러스, 오기와 외눈박이 옛 연인 루비의 에피소드로 살을 붙여 영화 <스모크>를 완성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시간’과 ‘거짓말’이다.
오기 렌(하비 케이틀)은 어느 날, 12년 동안 매일 아침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딱 한 장씩 찍어온 자신의 흑백 사진 4,000장을 친구이자 소설가인 폴(윌리엄 허트)에게 보여준다.
오기가 자신의 카메라에 담은 것은 시간이었다.
오기의 사진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그들 삶의 한순간을 살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의 청탁을 받고 크리스마스 원고를 궁리하던 폴에게 오기는 자신이 사진을 찍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이랬다.
1972년 여름, 오기는 자기 가게에서 성인 잡지를 훔치는 좀도둑을 본다.
급하게 뒤를 쫓지만 결국 놓친다.
도망가던 도둑이 지갑을 흘린다.
지갑 속에서 해맑은 소년의 사진을 본 오기는 시답잖은 성인 잡지쯤 잊기로 한다.
그해 크리스마스, 문득 지갑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한 오기는 좀도둑을 찾아간다.
지갑 주인은 없고 사진에서 본 아이의 할머니가 오기를 맞아준다.
늙고 눈까지 먼 에슬 할머니는 오기를 손자로 착각한다.
오기는 얼떨결에 손자 행세를 한다.
안부를 묻는 할머니에게 담배 가게에 취직했고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답한다.
할머니도 어렴풋이 오기가 손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둘은 ‘그런 척’한다.
할머니는 오기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즐거워하고 덕분에 오기도 행복해진다.
머니가 잠든 사이 지갑을 놓고 나오려던 오기는 그 집 화장실에서 우연히 본 카메라를 충동적으로 훔친다.
오기의 ‘시간 찍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희비극의 엇갈림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자기를 버린 생부를 찾아간 토마스(헤롤드 페리뉴)는 이름과 정체를 숨기고 아버지(포레스트 휘태커) 주위를 맴돈다.
18년 만에 불쑥 나타난 오기의 옛 연인 루비(스톡카드 채닝)는 “당신에게 딸이 있다”며 오기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약에 찌든 딸(인지 확실치 않은 아이)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펠리시티(행복)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할까?
에슬 할머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오기의 거짓말은 나쁜 짓인가?
현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말,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중첩된 <스모크>의 세계에는 정답이 없다.
삶의 어느 순간,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담배 연기처럼 모호해지고 무의미해진다.
나는 10년 전 중환자실에서 서서히 꺼져가던 엄마에게, 엄마가 어린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거짓말을 돌려주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든가, 번듯한 직장에 취직이 됐다거나 하는.
영화 한 편이 인생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는 못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허구)는 얼마든지 사실(진실)이 될 수 있다고, <스모크>의 세계가 내게 속살거린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생선 대가리를 좋아한다던 엄마의 거짓말이 때론 진실보다 더 무겁다는 걸 깨달아가는 요즈음이다.



필자소개 전영석
‘하루 한 편 영화 보기’가 꿈인 영화 애호가.
세상의 영화를 모두 해치우는 게 로망.
밥벌이 말고는 책 읽고 영화 보는 게 일.
닉네임 ‘타자 치는 스누피’로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영화의 영원 같은 찰나들을 기록하는 게 낙.
취미는 재밌고 슬프고 멋있고 죽이는 영화 추천하기.
오늘도 꿈을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매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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