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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문화 채집단 - 젊은 필진들이 선별한 이달의 문화

두근두근 문화 채집단

영감과 만족을 주는 것이면 장르를 불문하고 무엇이든 OK! 통통 튀는 젊은 필자들이 취향껏 선별한 각종
문화 정보를 소개합니다.



링 위의 여자들

넷플릭스 시리즈 <글로우: 레슬링 여인천하>




1980년대 미국 L.A. 열댓 명의 여자들이 레슬러로 다시 태어난다, 라고 소개하면 좋겠지만 이것은 그리 고상한 드라마가 아니다.
1985년 미국에서 첫 방영된 여자 레슬링 프로그램 <글로우>의 제작 과정을 극화한 <글로우: 레슬링 여인천하>에서 레슬링은 스포츠와 공연의 중간쯤 되는 슬랩스틱에 가깝다.
레슬링쇼가 제작된다는 소식에 모여든 각양각색의 연기자들은 레슬링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바닥에 몸을 내던지고 과장된 액션을 하며 자신의 출신, 외모, 인종적 고정관념을 이용해 만든 캐릭터를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각종 중독과 치정, 출생의 비밀도 빠질 수 없다.
갖가지 이유로 절박한 이들이 링을 장악하여 ‘내 몸의 주인이 되는’ 쾌감을 느끼는 순간, 시청자들은 비로소 그들의 퍼포먼스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진지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링 위의 드라마를 즐기면 그뿐이니까.
<글로우>는 그런 쇼이니까.
박지형



책은 멋진 물건입니다

책 <어떤 이름에게> 박선아




자라오며 책에 빚진 것이 많고, 그의 물성이 좋아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은 확실히 책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핸드폰을 보거나 티브이를 보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흐르기에 책을 붙잡고 있을 만한시간이 없다.
책 시장은 점점 좁아지고 무엇을 하든 종이와 얽히면 돈과 연결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만드는 사람들은 안 읽는 이를 탓하거나 한숨을 쉬게 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재미있는 책을 만드는 궁리를 하고 싶었다.
자신이 만든 책을 소개하는 것이 염치없지만, 지난 11월에 <어떤 이름에게>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엽서집과 서간집이 묶여 있다.
서간집을 읽고 엽서에 편지를 썼으면 하는 게 의도지만, 꼭 그렇진 않을 거다.
굿즈(엽서집)를 갖고 싶을 수도 있고, 책(서간집)만 읽고 싶을 수도 있다.
엽서는 부치지 않고 인테리어용으로 붙여두는 사람도 있겠지?
SNS에 보여주기 용으로 사진만 찍어 올리는 이도 있을 거다.
모든 일이 ‘책이 멋진 물건’임을 인정하는 행위라면, 그 모든 게 괜찮을 것 같았다.
재미있게 만들고 싶었는데, 재미있을까?
박선아



무엇을 위한 고통일까?

사진전 <라오스의 아침> 박노해




때 묻지 않은 바람이 빚어낸, 척박하고 황량하지만 살갑고 풍요로운 땅 라오스.
박노해 시인이 담아낸 이십여 장의 사진 중 유독 오랫동안 나의 발길을 붙들었던 사진이 있었으니 제목은 ‘잉여인간은 없다.’
잠시 묘사하면, 십시일반의 힘으로 집을 지으려는지 어린 아이며 젊은 여자, 늙은 남자 할 것 없이 한데 모여 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개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등 뒤로 아스라이 저녁노을이 지고 있다.
흑백사진이지만 저 멀리 새어 들어오는 붉은 빛이라든지, 소리 없는 분주함이라든지, 웃음이라든지, 하루의 수고로움 같은 것들이 눈에 보였다.
시인은 말했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결핍이 아니라고.
‘자기 존재가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것, 잉여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고통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아무 의미 없게 되는 것이 두려운 것 아니겠는가.’
문득 지금 나의 일상을 짓누르고 있는 크고 작은 고통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건 무엇을 위한 고통일까?
장보영



비극이 이해될 수 있을까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내 부모가 나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 가장 모른다.
상처받는 일들은 언제나 엄마 아빠의 눈 밖에서 일어났고, 그 무수한 일들을 털어놓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단한 그들의 삶에 걱정거리 하나를 더 얹기가 싫었고, 늘 믿음직하고 든든한 장녀이고 싶었다.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으면서 아들을 대신한 어머니의 구구절절한 해명에 눈물이 났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저자 수 클리볼드는 37명의 사상자를 내고, 범인은 자살했던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가해자의 엄마다.
넉넉하고 따뜻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녀에게 헌신적인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들이 하루아침에 악마로 변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린 것이 최고의 자랑이었던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이끔찍한 실패에 아들이 사건을 일으킨 동기를 찾으려 나선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아들의 친구들, 그 외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는 데 바친 16년.
그 과정에서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아들의 상처들을 발견한다.
미리 알았더라면,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녀의 아득하고 무한한 사랑의 노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지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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