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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예술산책 - 방방곡곡 예술이 자연스럽게 깃든 도시, 치앙마이

치앙마이 예술산책

박진숙
사진 정유희



방방곡곡 예술이 자연스럽게 깃든 도시, 치앙마이




언젠가 혼자 가서 온전히 나만의 치앙마이를 만나리라 마음먹은 지 2년 6개월 만에 소원을 이루었다.
작년 7월, 책을 쓴다는 핑계로 휴가를 얻어 과감하게 항공권을 끊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은 확실히 관광이 아니라 삶에 가까웠다.
단골 국수집, 단골 빨래방이 생기고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현지인 코스프레’에 맛을 들였달까?
하루에 단돈 200밧(약 6,000원)으로 사는 날도 많았다.
관광객들이 다니지 않는 숨은 명소와 맛집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했다.




처음엔 생각을 영 잘못했더랬다.
치앙마이에 유럽 사람들이 하도 많이 오니까 수준을 맞추느라 예술과 디자인에 신경을 썼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억측이고 편견이었다.
치앙마이 예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는 한국 여학생 제이에게 듣자니, 치앙마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술혼이 넘쳐나는 도시였다고 한다.
덕분에 치앙마이를 떠났던 예술가들도 다시 돌아오고, 방콕에서 작업하던 예술가들도 치앙마이에 아틀리에를 꾸리
는 추세라는 것이었다.
사실을 알고 나니 내 안에 감춰진 사대주의가 오해를 낳았다는 것에 부끄러웠다.
이후로 더욱 애정이 생겨서인지 치앙마이 여기저기에 감춰진 핸드메이드 공방과 빈티지 가게, 업사이클링 전문점을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갔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향수병이라도 도진 양 치앙마이가 그리워졌다.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예술의 기운으로 넘쳐나는 치앙마이로 향하고 싶었다.
요리조리 방법을 모색하다 묘수가 떠올랐다.
‘예술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로 여행 팀을 모으면 되겠구나.
치앙마이도 소개할 겸, 여행비도 일부 마련할 겸.’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치앙마이 예술산책> 1기 여행친구를 찾습니다’. 최소 4명, 최대 6명이 모이면 예술, 디자인, 크래프트를 중심으로 치앙마이를 둘러볼 예정이라는 홍보 글을 올린 지 불과 3일만에 4명이 모였다.
순식간이었다.
바쁜 12월에 시간을 내야 하는 만큼 사람들이 안 모이면 그냥 마음을 접어야지 했는데 급기야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다들 어렵게 돈을 마련해 식구들 설득하고 회사 상황을 조율해가며 얻어낸 여행이라며 ‘이 특별한 여행에 기대가 많다’고 했다.
갑자기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지’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벌인 일이지만 어떻게 그 사람들을 다 만족시킬까 싶어 걱정이 쌓여갔다.
마침 12월 6일에서 11일 사이에 NAP(Nimman Haemin Art Promenade:문화의 거리 님만해민을 중심으로 12월 초에 열리는 아트와 디자인 페스티벌)이 열리는터라 치앙마이 곳곳이 축제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행사의 중심지인 님만해민은 물론이거니와 구시가지 내에서도 디자인 & 크래프트 전시와 팝업 스토어가 여기저기 열려 볼거리, 즐길 거리가 넘쳤다.
님만해민 1번가를 가득 채운 팝업 스토어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넘쳐났다.
웬만하면 대충 보고 나올 만도 한데, 부스 하나하나가 외관부터 상품들까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일정 중에 두 번을 돌아도 아쉬움이 남았다.




<치앙마이 예술산책> 1기 일행은 때론 축제의 물결에 휩쓸렸다가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갤러리를 돌기도 하면서 6박 7일을 최대한 의미 있게 보내려 애썼다.
둘째 날 오후 내내 TCDC(Thailand Creative and Design Center)에서 각종 디자인 책들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먹자여행이나 골프여행으로 온 팀이라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일정이었으나 우리 일행은 달랐다.
마치 보물창고라도 발견한 양, ‘한국에서는 이렇게 찬찬히 디자인 & 아트 관련 책을 볼 여유가 없다’며 행복에 겨워했다.




다음 날은 차를 대절해 산깜펭으로 향했다.
우산마을로 유명한 산깜펭을 들른 후 마이암 미술관에서 천천히 오후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유명세에 비해 산깜펭은 그리 크지 않았다.
잔디가 곱게 깔린 중정을 가운데 두고 디귿자로 우산을 만드는 장인들이 쉴 새없이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를 깎는 노인들로부터 시작해, 종이에 천연염료를 먹이는 여인을 지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우산살을 깎는 장인들을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종이 우산에 그림을 넣어주는 화가들의 화려한 붓놀림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하늘을 덮을 듯 커다란 파라솔부터 겨우 손바닥만 한 장식용 우산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정성스레 만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배가 출출해질 때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마이암 미술관에 도착했다.
정식 명칭은 마이암 컨템포러리 아트 뮤지엄(Maiiam Contemporary Art Museum).
‘거울로 뒤덮은 미술관’이라고 불릴 만큼 마이암 미술관은 전체가 유리로 이루어졌다.
이 미술관은 2017년 Best New Museum of Asia Pacific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미감이 뛰어났고, 미술관 안의 전시 내용 모두 훌륭해 일행 모두 놀랐다.
1층에는 말레이 반도에 위치한 Patani 지역의 무슬림의 역사에 대한 무거운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2층에는 태국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제일 인상적이었던건 치앙마이 현대 작가 중 가장 유명한 나빈 라완차이쿨(Navin Rawanchaikul)의 작품 시리즈.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의 모든 영역에 걸쳐 극렬히 상업화된 모습을 거대하면서도 디테일한 화법으로 그려낸 나빈의 작품에 우리 모두 입을 쩍 벌렸다.
‘마이암 미술관, 산깜펭 가는 김에 들러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별 기대 없이 찾아간 곳이라 그런지 더욱 감탄을 자아냈다.




10일인 일요일을 특히나 기다렸다.
예술인 마을이라 불리는 반깡왓에서 선데이 모닝 마켓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마을이라 하기에 부끄러울 만큼 작지만 작은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인 공방과 갤러리, 카페, 도서관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지난 7월엔 평일에 다녀가느라 적막함이 돌만큼 한산했던 반깡왓이 12월의 일요일에는 선데이마켓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쪽빛으로 염색한 옷을 파는 가게, 손으로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패브릭 소품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작가, 불과 2천 원에 태국의 맛을 물씬 느끼게 해주는 로컬 음식들.
초록으로 반짝이는 반깡왓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배어 나왔다.
‘풍성함과 여유란 이런 거구나.’ 마음이 절로 흡족해졌다.




이번 <치앙마이 예술산책>의 대미는 카민 릇차이프라슨(Kamin Lertchaiprasert)이장식해주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제이의 소개로 31st Museum을 찾아갔다.
카민은 치앙마이 예술대학 교수를 지낸 학자이자 예술가로서 2017년에 5년간 수상자가 없었던 태국 내셔널 아티스트 어워드에서 올해의 수상작가로 뽑힌 인물이라고 했다.
제이가 꼭 만나보라고 권했던 만큼 기대가 컸다.
귀인을 만나러 가는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말이 거창해 31st Museum이지, 호텔 직원도 택시 아저씨도 난생 처음 듣는 곳이라며 난감해했다.
결국 3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반을 넘어 헤매다 겨우 찾았다.
‘이렇게까지 어렵게 찾아갔는데 별거 없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치앙마이 외곽 한적한 시골마을의 숲 속에 덩그러니 컨테이너 박스가 몇 채 우리를 맞이했다.
뒤로 곱게 머리를 넘겨 묶은 중년의 남자가 카민이라고 했다.
비교적 작고 마른 체구였지만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카민은 왜 이런 엉뚱한 박물관을 만들게 되었는지부터 소개했다.
시작은 일본 가나자와였다고 했다.
10여 년 전에 가나자와의 한 공립학교에 방문했을 때 그 곳 교장선생님이 500명이나 되는 유치원생들에게 일일이 ‘그 아이만의 장점’을 한 가지씩 적어주더라는 것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카민은 고집만 피우고 장점이 없는 아이도 있지 않느냐고 따졌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은 ‘모든 사람에게는 한 가지라라도 좋은 점이 있다’며 단호하게 답하셨고 카민에게도 글귀를 써주셨다고 한다.
그 일에 영감을 받아 카민은 대규모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과거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부터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잡다한 물건들을 전시장에 가득 채웠다.
얼핏 시시할 것 같은 전시는 의외로 선풍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연이어 방콕, 시카고, 뉴욕에서도 대규모 전시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카민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특별하지만 모든 것이 특별하지는 않아요. 우리 몸과 정신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어요.
예술가는 평범한 직업에 불과하지만, 예술가만의 시선으로 평범한 일상과 사람들 안에서 예술을 끄집어내는 거죠.”
그는 알 듯 모를 듯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는데 분명한 건 카민이 인간의 긍정적인 힘에 집중한다는 사실이었다.





치앙마이 시내로 돌아오는 썽태우(트럭을 개조한 합승택시) 안에서 우리 일행은 카민이 던진 화두를 해석하기에 바빴다.
제이는 덧붙였다.
카민은 태국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지만 아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산다고, 처음에는 그게 샘이 났지만 지금은 부럽다고.
아침에 일어나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비교적 규칙적으로 성실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카민은 자유방임의 대명사라 불리는 예술가들보다 오히려 예술가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우리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숱한 질문과 자극을 양산하며 <치앙마이예술산책> 1기 4명은 각자 만족스럽게 여행을 마쳤다.
웹툰 스토리작가와 문화잡지 편집장, 수능을 치르지 않은 고3생, 시민단체 대표가 어우러져 어렵게 마련한 6박 7일은그렇게 마치 꿈결처럼 지나갔다.



필자소개 박진숙
시민단체 ‘에코팜므’ 대표, 작가, 인권교육 강사 등 하는 일이 많다.
스스로 ‘다품종 소량 생산’ 인생이라 칭하며 살아간다.
돈 모으는 족족 여행에 탕진하는 터라 여행 가이드를 직업란에 추가하려고 궁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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