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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계를 지운 편지 - 달력 마을의 사람들에게 부치는 편지

시간의 경계를 지운 편지

변왕중
사진 박민정


달력 마을의 사람들에게 부치는 편지


안녕하세요, 새로운 해가 밝았어요.
지금도 다들 잘 지내고 있죠?
내가 당신들을 처음 만났던 때가 아홉 살 겨울이었어요.
밝고 창백한 날들이었죠.
우리 부모님은 인정이 많은 주인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어요.
나는 겨울방학 내내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죠.
웬일인지 동네가 텅 비었기 때문이에요.
겨울방학을 하는 날부터 동네 아이들은 철새를 쫓아 남쪽으로 떠나버린 것 같았죠.
이따금씩 남아 있는 동네친구들이 집에 찾아왔어요.
그중에 혁조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우리 집보다 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무려 여덟 남매의 넷째였어요.
코 밑은 늘 헐어 있고, 소매는 늘 콧물로 젖어 있고, 주머니에는 늘 돌멩이가 들어 있는 친구였죠.
혁조와 나는 얼어붙은 시냇물을 따라 스케이트를 지치거나 들판 한쪽에 앉아서 못된 불장난을 했어요.
한번은 아주 큰불이 날 뻔도 한 것 같네요.
그런 어느 하루 혁조가 무지무지 비밀스러운 얼굴로 말했죠.

“청림이발소에 <강가딘> 있다.”

<강가딘>은 만화책이었어요.
주인공은 강가딘이란 요상한 이름의 개고, 예삐라는 아주 예쁜 여자친구가 있었죠.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마을 정거장 옆에 있는 이발소에 가본 적이 없었어요.
나는 아버지가 이발소에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요.
행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아버지를 따라 개선장군처럼 이발소에 상륙했죠.
마드기름을 발라 머리를 뒤로 착 넘긴 이발소 아저씨는 세상 둘도 없는 수다쟁이였어요.
아버지가 머리를 자르고 머리를 감고 녹색 스킨을 얼굴에 턱턱 바를 때까지 쉴 새 없이 만화책을 읽었어요.
물론 그래 봤자 이발소 안에 있는 수십 권의 만화책 중에서 서너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내 안타까운 얼굴을 본 이발소 아저씨는 손님이 없는 오후라면 만화책을 보러 와도 좋다고 허락했어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란 게 바로 그런 거겠죠.




다음 날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죠.
아랫목에서 아버지의 저녁밥과 나란히 웅크리고 있다가 오후 무렵,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면 솜이불을 빠져나갔어요. 
꽁 얼어붙은 수돗가를 지나 대문 밖으로 나가면 쌩, 반짝이는 철사처럼 차가운 바람이 콧등과 뺨과 귀를 찌르고 지나갔어요.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골목을 지나 큰길을 따라 버스가 오는 정거장까지 달려갔죠.
이발소 문을 열고 인사를 하면, 이발소 아저씨는 ‘춥다, 문 닫아라’ 하고 소리를 쳤는데 언제나 손에는 가위가 쥐어져 있었어요.
그때부터 나는 의자에 앉아서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죠.
떠버리 이발소 아저씨는 손님이 없으면 라디오와 이야기를 나눴어요.
곧 해가 완전히 져서 깜깜해졌어요.
그 이발소 안에는 달력이 두 개 걸려 있었죠.
숫자만 있는 우리 집과는 완전히 다른 달력이었어요.
하나는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 열세 명이(8월에만 두 명이었죠!) 각각 다른 해변을 배경으로 똥폼을 잡고 있는 달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즈넉한 유럽 풍경이 담긴 달력이었죠.
유럽 풍경 달력은 출입구 옆에 붙어 있었어요.
아직 비키니 여인들에게는 관심이 없을 나이였던 나는 유럽 풍경 달력 앞에 서서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닿을 수 없는 오래된 성들과 마을들을 응시하곤 했어요.
높은 망루나 빨간색의 지붕들이 보이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양떼들이 노래하는, 불행이란 말을 모르는 다정한 사람들이 요정들과 어울려 살 것 같은 세계였죠.
크면 꼭 그곳에 직접 가보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네요.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가 나고 따뜻한 난로 위의 주전자 물이 보글보글 끓던 아홉 살 겨울이었죠.





어느 순간이면 이발소 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 윤곽으로 선 아빠가 집에 가자고 이름을 불렀어요.
아빠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집으로 돌아가 나물 반찬으로 저녁을 먹고 탐구생활을 풀고 늘 똑같은 일기를 쓰고 엄마 옆에 누우면 달력 속의 고성과 마을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갔어요.
상상 속의 나는 달력 속으로 입장했어요.
장롱이나 헛간이나 수도관을 통해 다른 세계로 이어지듯이.
달력 속으로 들어간 아홉 살의 나는 마을의 집마다 찾아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어요.
바로 당신들이죠.
두들 나를 다정하게 맞아주었어요.
나는 터질 듯이 행복했어요.
온갖 이야기들이 끝없이 펼쳐졌고 그러다 잠이 들었죠.
꿈속에서도 여러 번 달력 속, 당신들이 사는 세계에 다녀오곤 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아빠는 자전거를 타고 일터로 나갔고 엄마는 단칸방과 부엌을 오가면서 반찬을 만들거나 바느질을 했어요.
나는 다시 해질녘을 기다렸죠.
오후가 깊어지면 이발소로 달려가 만화책을 보고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겼어요.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만화책은 보지 않게 되었죠.
이미 너무 많이 되풀이해서 읽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때부터는 이발소 아저씨와 손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네요.
그래도 달력은 계속해서 봤어요.
아빠를 따라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일기를 쓰고 누워서 당신들을 찾아갔어요.
해가 흐르고 새로운 달력을 볼 때마다 아홉 살 겨울, 청림이발소에 걸려 있던 달력을 생각하곤 했네요.
달력 속의 마을과 그 마을에 옹기종기 살고 있는 당신들을.
럴 때면 잠시 잠깐 이 세상이 굉장해 보였어요.
얼마 전 문득 오랜 여행을 다녀온 아내가, 자신이 찍어온 유럽의 성과 마을 사진을 두고 달력 이야기를 꺼냈어요.
그녀는 그리운 목소리로 어릴 때 달력 속의 세계를 보고 상상하는 게 그렇게 좋았다고 하네요.
어쩌면 내가 만난 당신들을 그녀도 만났을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당신들 중 누군가가 아홉 살의 내게, 일곱 살 소녀의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겠네요.
반대로 일곱 살의 소녀에게 아홉 살의 소년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겠어요.
그것이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을지 몰라요.
아, 이거 참. 안타깝고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언제나 잊지 않고 있어요. 고마워요, 달력 마을 사람들.



필자소개 변왕중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씁니다.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쉽게 닿을 수 없는 멀고 어두운 곳까지 글로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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