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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석의 부엉이 극장 - 아이 캔 스피크 :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의 힘

전영석의 부엉이 극장

전영석



아이 캔 스피크 :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의 힘

“흉터에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거든.”
-코맥 매카시 <모두 다 예쁜 말들> 中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았다.
포스터만 보고 할머니가 늘그막에 영어 배우는 이야기인가 보다 짐작했다.
조금 웃기다가 막판에 감동코드 한 스푼 넣은 뻔한 신파조 영화이겠거니 싶었다.





편견과 오만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아이 캔 스피크>를 보며 다시 한 번 배운다.
오랜만에 진짜 작정하고 울었다.
눈물 찍 콧물 찍 영혼까지 다 털렸다.
그렇다고 <아이 캔 스피크>가 영상적으로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진심을 다해 건네는 이야기의 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의 힘은 세다’는 사실만 오롯이 남는다.
어쨌든 영화의 만듦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흔한 폭력도 살인도 음모도 없다.
피 한 방울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자극적이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긁는다.
나아가 가슴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아이 캔 스피크>엔 개인과 사회를 할퀴고 간 역사와 숨길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이야기의 진실만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나문희의 연기에는 관객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나문희는 언제나 옳다.
그러나 구성은 엉터리이고 사건의 개연성은 어디 가서 꿔오고 싶을 만큼 부족하다.
대한민국 공무원의 세태를 고발하던 초반의 결기, 시장 재개발 사업의 음모와 갈등은 중반 이후 변기의 휴지처럼 풀어져 사라진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것들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남겨진 역사의 흉터 같은, 지난 시대의 살아 있는 상처 같은, 나옥분이란 캐릭터의 구불구불한 굴곡만 느끼면 된다.
그녀의 상처는 시간 속에 곪으며 흉터가 되었다.
여전히 썩고있는, 아물지 않은 그 흉터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다.

영화는 대한민국 국민의 망국병 ‘영어 열등감’을 건드리며 시작한다.
영리하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 셋(여자, 위안부 할머니, 독거노인)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공무원의 복지부동,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꿈이 사라진 청년 세대 등의 소재는 고명이자 양념이다.
그 재료들을 명장의 솜씨로 버무리진 못했지만, 생활의 달인급 정도의 이야기로 뽑아냈다.
<아이 캔 스피크>는 무겁고 어두운 현대사의 굴곡(위안부 문제)을 어떻게 대중영화 속에 녹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이다.
이런 유(類) 영화의 연출 포인트는 두 가지.
1) 인물과 사건의 감정을 잘 감춰야 한다, 2) 잘 숨기던 감정을 터뜨려야 할 때 제대로 터뜨려줘야 한다.
<아이 캔 스피크>는 둘 다 잘했다.
특히나 역사적 소재를 일상의 이야기로 리터치한 ‘대중적 독창성’에 만점을 주고 싶다.

나옥분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는 진짜 이유는 두 개의 트릭을 거쳐 역사적 사명감으로 영리하게 진화한다.
1시간 40분쯤 보고 나서야 ‘I can speak’란 대사의 묵직한 실체가 드러난다.
이 말은 ‘네, 증언하겠습니다’로 번역된다.
그 순간, 나옥분의 발화는 단순한 영어 스피치가 아니라 역사적 증언이 된다.
그리고 아….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란 그 뻔한 말, 상투적 영어의 전설이자 한국인이 가장 먼저 배우는 기본 영어 문장이 보는 이의 가슴을 쥐어짜며 사람을 이렇게 깊게 울릴 줄이야!
옥분 여사가 웃으며 그 말을 할 때 우리 가슴은 갈가리 찢어진다.
가장 낮은 곳의 단순함과 유치함이 가장 높은 곳의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는 연금술.
그 뻔한 말의 울림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반성한다.
미안해요, “I’m fine thank you and you?”


필자소개 전영석
‘하루 한 편 영화 보기’가 꿈인 영화 애호가.
세상의 영화를 모두 해치우는 게 로망.
밥벌이 말고는 책 읽고 영화 보는 게 일.
닉네임 ‘타자 치는 스누피’로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영화의 영원 같은 찰나들을 기록하는 게 낙.
취미는 재밌고 슬프고 멋있고 죽이는 영화 추천하기.
오늘도 꿈을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매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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