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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경제 산책 - 조선의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와의 인연

임원경제 산책

글과 사진 정명현




조선의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와의 인연



운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바뀌기도 한다.
의도되었건 아니건 간에, 그 운명의 계기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운명 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책만 읽던 조선의 한 선비에게도 그랬다.
행색이 아주 초라한 선비가 조선 제일의 부자를 찾아갔다.
그러고는 대뜸 황당한 요구를 했다.
“제가 집이 가난합니다. 작은 시험을 해보고 싶은데, 당신께 만 냥을 빌리고 싶습니다(吾家貧, 欲有所小試, 願從君借萬金).”
만 냥을 지금 단위로 환산하면 약 2~8억 원 정도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대략 5억원 내외가 되는 셈이다.
부자도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러시오(諾).”
누구 이야기일까.
이미 알아챈 분들이 많겠지만, <허생전> (원제목은 <옥갑야화>)에 나오는 허생(許生)의 이야기다.
조선 후기 저명한 이야기꾼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지은 소설 말이다.
위에 소개한 내용이 <허생전>에서 허생과 부자 변 씨(卞氏)가 처음 만나 나눈 대화의 전부다.
허생은 당당했고, 변 씨는 쿨했다.
인간적인 신뢰성, 거금을 빌려야 하는 이유, 사업 계획, 변제 금액의 약속 등 온갖 진지한 사업 설명을 해도 될까 말까 할 텐데, 허생은 일 하나 벌려보겠다는 말 한마디만 건넬 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만 냥을 받자 허생은 감사의 인사도 없이 휙 가버렸다(立與萬金, 客竟不謝而去). 그리고 이를 밑천 삼아 백만 냥을 벌었다.
인생 대역전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로 운명이 바뀐 이가 있다.


<임원경제지>를 번역할 수 있도록 후원해준 DYB최선어학원 송오현 원장(좌)과 필자(우).


“돈 없는 대학원생이라 여력이 없습니다.
비슷한 처지의 소장 학자들과 <임원경제지>라는 고전을 번역하고 싶은데, 후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죠.”
그러고는 그는 덥석 3억 원을 후원해줬다.
대학원생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당해 잠시 황당해했지만, 뛸 듯이 기뻤다.
자신이 마치 <허생전>의 주인공이나 된 듯했다.
2002년내게 일어난 이야기다.
구조는 비슷하지만 내용을 비교하면 후자의 스토리는 <허생전>과 여러 차이가 있었다.
우선 후원자가 대한민국 제일의 갑부는 아니었다.
대한민국 제일의 갑부를 찾아가 볼까도 여러 번 상상해보았지만, 그럴 용기까지는 없었다.
문전박대가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분은 서울 대치동에서 학원을 경영하던 송오현 원장님이었다.
10년 정도 학원을 경영하면서 줄곧 성장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해도, 지속적인 연구와 사업투자에 집중하던 시기라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DYB최선어학원, 지금은 서울과 수도권 10여 곳에 분원을 둔 중견 교육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나는 허생처럼 요구사항을 간명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편지를 통해 <임원경제지>라는 고전을 번역하려 했던 취지와 목표, 기대효과 등을 많은 양에 걸쳐 진심을 담아 쏟아냈다.
게다가 우리 둘은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 시점으로부터 7년 전, 송 원장님은 나의 보스였다.
DYB최선어학원은 내 직장이었고, 나는 영어강사로서 영어교습법 등을 그분에게서 많이 배우기도 했다.
2년여 동안은 <논어>나 <노자> 같은 동양고전을 함께 공부하기도 했고, 원장님의 자녀들에게 동양고전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친 교유가 있었기에 상대를 비교적 알 만큼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나는 계획대로 소장 학자를 모아 2003년부터 <임원경제지> 번역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후로 이제까지 총 16억 원이 후원되었고, 그 후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이후 여러 후원자로 확대되었다.
‘임원경제 산책’이라는 코너는 이렇게 시작한 <임원경제지> 번역 연구과정에서 알게 된 지식을 현대인들에게 쉽게 전달해주고 오늘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 목표를 둔다.
이 코너를 주제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임원경제지> 속 252만여 자의 한자 암호가 한글로 하나씩 해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임원경제지>해독의 본격적 출발과 지금에 이른 성과는 한 독지가가 베푼 사회적 환원 차원의 조건 없는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원경제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야기 하나를 더 풀어야 한다.
내가 왜 <임원경제지>를 번역하려는 마음을 먹었느냐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대학에서 유전공학을 전공하여 생명과학에 심취해 있던 나는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저술에서 동양사상을 흡수한 뒤로, 1993년 도올서원이 개원된 이래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한학과 인문학의 광활한 세계에 입문했다.
선생님께서는 학자라면 반드시 번역서를 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10년 내로 번역서를 한 권씩 출간하라고 몇몇 제자들에게 엄명(?)을 내리셨다.
이 엄명이 내 마음속의 큰 숙제가 되었다.


본문에 인용한 박지원의 <허생전> 속, 선비 ‘허생’과 부자 ‘변 씨’의 이야기 부분.


그러던 차에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임원경제지>와 조우했다.
학문적으로 처음 만날 때 <임원경제지>는 내게 조연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 연구의 주연이 되려는지, 물속에 잠겨 안 보이던 어마어마한 빙산의 일각을 내게 서서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논문 주제를 모색하던 도중 <임원경제지>를 진지하게 살펴보다가, 그 규모와 내용과 체계에 놀랐다.
더 알고 싶었다.
우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번역서를 찾았다.
제대로 알아서 자신 있게 주연으로 캐스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이 책이 한번도 한글로 번역된 적이 없는 것이다.
국사책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책의 번역서가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때부터였다.
<임원경제지>를 학문의 연인으로 짝사랑하게 된 시점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도 안 되는데, 그 연인은 결코 속을 드러내주지도 않았다.
미칠 것 같았다.
짝사랑의 대상을 제대로 알고 싶었다.
도올 선생님이 떠올랐다.
이참에 묵은 과제까지 해치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욱 조바심이 났다.
상사병을 앓으며 자연스레 이 책의 번역을 꿈꿨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를 가장 잘 알아줄 수 있는 송오현 원장님께 앞서 이야기했던 거사를 감행했다.
나의 운명은 나도 모르게 바뀌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인생 대역전을 통해 공부한 내용의 일부를 독자분들과 공유하려 한다.



일본 오사카부립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임원경제지> 원본들.


임원경제란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풀어야 한다.
임원(林園)은 숲과 정원, 즉 ‘자연이 어우러진 시골’을 말한다.
경제(經濟)는 가정의 운영이다.
살갑고 적확한 표현으로 ‘살림살이’다.
‘지(志)’는 ‘기록’이라는 뜻의 ‘지(誌)’와 같은 말이다.
특히 이 ‘지(志)’자가 붙은 저술은 특정 분야의 전문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임원경제지’는 ‘시골에서 가정을 꾸려 가는 데에 필요한 지식의 기록’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임원경제’는 여기서 ‘~의 기록’이라는 말만 빼면 되겠다.
이를 더 간단하게 말하면 ‘시골 살림살이’인 것이다.
시골 살림살이.
‘쳇 겨우 그거였어?’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뭐?’ 이런 반응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뻔히 아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나 우리 삶과 무관한 먼 나라 이야기로 여기는 분도 있을 것이다.
역사 고고학적 취미를 가진 사람이나 관심을 가질 만한 분야로 여길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입장을 존중한다.
하지만 임원경제, 즉 시골 살림살이에 대해 갖고 있던 기존의 입장을 잠시 유보해두시기를 바란다.
독자님들께서 200여년 전 이 땅에서 시골 살림살이를 고심했던 한 사람의 역정과 그 결과물인 <임원경제지>를 평심하게 들여다보셨으면 한다.
임원경제는 성실하고 자상한 조선의 석학이 조선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가려했던 오랜 고투의 산물이다.
200여 년 전 저술이라는 점만 주목하다 보면 역사성에 매몰되어 지금 우리의 관심을 놓칠 우려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기준으로만 200년 전을 재단해도 역사상을 오해할 수 있다.
이런 일방적인 관점들을 떠나면 임원경제는 현대인의 살림살이와도 맥이 상당히 닿아 있다.
아무리 지난 수십 년 사이에 과학과 기술의 변화로 인한 문명의 전환이 크게 일어났다 해도, 현대인도 조선인과 마찬가지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고전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이라는 신체조건의 변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음 회부터 ‘조선의 브리태니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임원경제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이어가도록 하겠다.
이 책의 저자 이야기는 아직 꺼내지도 못했다.
<임원경제지>를 처음 보신 분, 기억이 가물가물하신 분, 지금 바로 그 저자라도 검색해봅시다.



필자소개 정명현
생명과학에 빠져 있다가 인문학에 눈을 떠 내친 김에 도올서원과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 여정을 통해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를 알게 됐다.
멋모르고 잡았는데 감당불가.
여러 인문학자들과 힘을 합치고는 있지만, 번역하느라 등골이 빠진다.
그래도 하나씩 알게 될 때 엄청 재밌고 놀랍다.
시민들이 새 희망의 빛을 이 책에서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게 돕고 싶다.
임원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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