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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의 맛동산 <없는 잘못도 회개하게 만드는 알싸한 홍탁>

김하늘의 맛동산

글과 사진 김하늘




없는 잘못도 회개하게 만드는 알싸한 홍탁


나의 사춘기는 고요했다.
그 흔한 중2병의 지랄 섞인 반항도 없었다.
기껏 부린 아노미적 행동이라고는, 노랗게 블리치를 한 녀석들을 하수 취급하며 블루블랙 컬러로 머리카락을 통으로 염색한 것이다.
여고에 입학한 후엔 말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수다를 떠는 시간보다 혼자 음악을 듣는 시간이 더 많았다.
레코드샵에 드나드는 빈도는 잦아져갔다.
발랄하고 청렬한 하이틴 가요보다 강렬한 1960~1970년대 록밴드 음악에 빠져들었다.
구들은 하나같이 내 취향이 별나다고만 했다.
이어폰 한쪽을 건넬 만한 친구는 스무 살이 되어도, 서른 살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취향은 녹슬어가고 감각은 무뎌져갔다.




음악평론가라는 남자가 나타났다.
페이스북에서 만났다. 버튼 하나로 친구가 되었고 타임라인으로 일상을 공유했다.
음악과 음식으로 북적이는 그의 타임라인을 보아하니 나의 별난 취향은 더 이상 별난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메신저로 대화까지 나누게 됐다.
그 은밀한 발단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흥에 젖어 시간도둑을 만난 것 같았던 기억은 선명하다.
나 혼자만 알고 있던 수많은 록밴드를 마치 위키피디아처럼 펼쳐내고 기분과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음악의 유튜브 링크를 무심한 듯 시크
하게 건넸다.
그의 이름으로 이름 지어진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될 무렵, 자연스럽게 우리 만남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선을 넘었다.
혼자 듣던 음악을 나눠 듣고, 혼자 먹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취향의 동심원을 그려나갔다.
어느새 서로를 향한 마음도 선을 넘어버렸다.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동행했다.
어디까지 입맛이 같은지, 어디까지 먹을 수 있는지 탐색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중 가장 강력하게 입맛의 중력을 당긴 것은 바로 삭힌 홍어다.
푹 삭혀 견실해진 살점을 ‘오득’ 하고 씹으면 마치 파스를 씹어 삼킨 것처럼 목구멍에서 기침이 솟구치고 콧구멍에서 암모니아 가스가 뿜
어져 나온다.
그때 당황하지 말고 탁주 한 잔을 들이키면 탁주가 그 독한 알싸함을 야무지게 휘감아 넘긴다.
홍탁, 홍어와 탁주를 괜히 짝지은 것이 아니다.
취향과 감각은 선명해진다.
우리는 주로 청계천과 을지로 사이에서 만났다.
도심 한복판의 뒷골목엔 쇠를 깎거나 인쇄기를 돌리는 가게가 즐비하다.
골목 틈바구니에는 밥과 술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속속들이 박혀 있다.
을지로4가 뒷골목을 헤치고 돌아다니다 보면 <홍탁집>이라는 노란 앉은뱅이 간판이 보인다.
가게 이름이라기보다 홍탁을 판다는 표시 정도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후미진 곳이라 눈보다 코가 먼저 알아본다.
냄새의 근원지와 가까워질수록 쿰쿰한 냄새의 농도는 짙어진다.
한쪽 발이 입구에 닿자마자 팔을 뻗어 알루미늄 문을 열어젖힌다.
8평 남짓한 작은 규모의 가게라 고개를 먼저 들이밀고 빈자리가 있는지 우선 살핀다.
이 집의 영업시간은 낮 2시부터 저녁 10시까지다.
애매하다.
하지만 홍탁집의 간판 위쪽에 ‘농주와 홍어회’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영업시간이 이해가 간다.
농주는 농사일을 할 때 일꾼들을 대접하기 위해 농가에서 빚는 술을 말한다.
그러니 두세시쯤 가게 문을 여는 것이다.
4~5시가 되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보리 작업복을 입은 이 근방 노동자들보다 백발의 노인들이 가게를 채운다.
이 집은 개업한 지 40년이 넘었다.
현재 사장님이 15년 동안 운영해왔다.
원(原)사장님은 아직도 양조를 하며 이 집에 농주를 실어 나른다.
아마도 가게를 가득 메우는 지금의 노인들은 그때의 젊은 노동자였으리라.
원형의 대포집 탁자에 켜켜이 얽힌 나이테에 그들과 함께한 세월과 추억이 배어 있다.
노인들 틈바구니에서 자리를 잡는다.
수수한 벽에 붙은 간단한 메뉴판.
이 집은 칠레산 홍어를 쓴다.
홍어회, 찜, 탕이 각각 12,000원.
돼지고기가 딸린 메뉴는 그 이상, 홍어 메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10,000원 이하다.
손가락 두 마디만치 자른 맵싸한 마늘종과 터벅터벅 썬 양파 그리고 짙은 고동색 된장이 깔린다.
우선 갈증을 해소할 농주 한 주전자를 시킨다.
그와 나는 평소 세게 삭힌 것을 더 선호한다.
자비하게 콧속과 입천장을 때려서 없던 잘못도 회개하게 만드는 정도로 세게 말이다.
이 집 회는 무난하게 삭힌 편이라 늘 찜을 시킨다.
홍어는 열을 받으면 성질을 부풀린다.
마치 중2병의 지랄처럼 말이다.





이 집 농주는 탄산이 적고 단맛이 덜하며 드라이한 편이다.
그래서 홍어의 치솟는 맛이 단맛으로 농락당할 일이 없다.
농주를 한두 대접 넘기다 보면 촉촉한 홍어찜과 고춧가루를 뒤집어쓴 콩나물무침 한 접시가 나온다.
가느다란 젓가락 끝이 안달난다.
수분을 충분히 머금은 홍어의 살점을 가르면 결대로 얌전하게 떨어져 나온다.
흐물거리는 살점을 입에 넣고 콧숨을 내쉰 다음 빨간 콩나물을 한입 씹어 아삭아삭 다지고 남은 향은 농주로 누그러뜨린다.
이 집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는 순간, 끝을 가늠할 수 없으리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홍어와 농주의 밸런스가 코와 혀를 맴돈다.
이럴 때는 음악 한잔으로 그 허기를 달래야 한다.
나의 고요한 사춘기를 장식했던 노래 하나를 튼다.
레너드 스키너드의 다.
나온 지 수십 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술 취한 아재들이 LP바에서 종종 신청하는 노래다.
영화 <킹스맨>의 그 유명한 교회 학살 신에도 나온다.
나는 홍탁을 먹을 때면 이러한 서던 록(Southern Rock)이 생각난다.
국 남부 백인들의 땀 냄새와 1970년대 로커들의 화려한 연주력이 홍어와 농주처럼 조화를 이룬다.
언제 들어도 구수하고 격렬하며 섹시하다.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인이 박혀 찾게 되는 매력이 홍탁과 닮았다.
허구한 날 맛집을 전전하며 취향과 감각을 공유하던 그 음악평론가는 지금의 남편이 되었다.
이어폰 한쪽을 나눠 낄 친구가 생긴 것이다.




필자소개 김하늘
외식브랜드 컨설팅 회사 <브랜드테일러스>에서 음식 브랜드 창업과 운영에 관한 다양한 기획을 하며 먹고 산다.
식당의 이름을 짓거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동선을 설계하는 등의 일이다.
유행에 반짝이는 카페보다 오래도록 거기에 있는 백반집을 더 아낀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것을 좋아한다.
경험하고 느끼고 말하는 식사 모임 ‘飯嘗會(반상회)’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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