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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경제 산책 - 왜 임원경제인가: 조선판 잘 먹고 잘사는 법

임원경제 산책

글과 사진 정명현





왜 임원경제인가 : 조선판 잘 먹고 잘 사는 법


초가삼간은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로 다 기울어갔다.
그 집 선비는 그래도 아랑곳없이 독서삼매경에만 빠져 있었다.
살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아내는 하는 수 없이 삯바느질로 입에 근근이 풀칠하며 살아야 했다.
배가 몹시 고팠던 어느 날, 아내는 자신의 처량한 꼬락서니에 열불이 나서 눈물이 절로 났다.
신세한탄이라도 할 셈으로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조영 <송하독서도>. (국립중앙박물관)


“서방님, 당신은 평생 과거도 보지 않으면서 글은 읽어 뭘 할 건데요(子平生不赴擧, 讀書何爲)?”
이 말을 들은 선비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글 읽기가 아직은 기대 수준에 오르지 못했어요(吾讀書未熟).”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점점 화가 달아올랐다.
그래도 가슴을 꾹 누르고 한마디 던졌다.
“그러며언~ 끼니도 해결 못하는데, 노가다라도 뛰셔야 하지 않나요(不有工乎)?”
“허허~ 노가다는 평소에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겠소(工未素學, 奈何)?”
이 말에 아내는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한다.
“그러며언~ 장사라도 해보시든가요(不有商乎).”
“장사는 밑천도 없는데, 어떻게 하겠소(商無本錢, 奈何)?”
아내의 염장을 지르는 말이었다.
드디어 복장이 터진 아내는 냅다 소리 질렀다.
“들입~~다 책만 읽더니, 이제까지 배웠다는 게 기껏 ‘어떻게 하겠소?’라는 말이에욧? 네? 노가다도 못한다, 장사도 못한다. 응? 그러면 도둑질이라도 해오시든가욧(晝夜讀書, 只學奈何, 不工不商, 何不盜賊)!”
아내의 논리정연한 아우성은 충격적이었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얘기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선비는 책을 덮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우쒸~! 애당초 계획은 10년 공부였는데 말야…. 7년밖에 안 됐구만 심사를 뒤트는구려(惜乎, 吾讀書本期十年, 今七年矣)!”

또 허생의 얘기다.
지난 호에서 나는 장안 최고의 부자 변 씨와의 만남이 허생에게 운명 전환의 계기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계기의 더 근원적인 단초이자, 보다 본질적인 계기는 바로 아내의 자극이었다.
아내의 아우성은 꿈쩍도 않던 허생을 움직였다.
선비의 자발적 가출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그의 운명은 여기서 갈렸던 것이다.
뒤끝 작렬하여 가출은 이후 5년간 이어졌다.
내 얘기 같기도 하고, 주변에서 보거나 듣던 얘기 같기도 하지 않은가. 
18~19세기경 조선에도 남편은 아내를 고생시켰고, 아내는 그런 눈물겨운 시절을 살아야 했다.
<허생전>에서는 허생이 경제적 대성공을 거두는 과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글만 보던 조선 선비 대부분은 과거 급제의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에 평생 고시생이었고, 당연히 그 대부분은 백수다.
재수, 삼수, 사수…, 장수를 하다가 그냥 저냥 글로 벌어먹고 살거나, 가난을 자처하고 산다.
과거 준비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유지하는 명분이다.
하지만 명분만 걸어둘 뿐 대부분은 그냥 놀고먹는 이들이다.
농사를 짓지 않았고, 막일도 하지 않았으며, 장사는 아예 인생 막장일 때도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렇게 놀고먹는 이들을 당시의 표현으로 유식자(遊食者)라 했다.
유식자는 조선 후기 사회의 큰 골칫거리였다.
가난한 살림이 한 가정에 그치지 않고, 그마을로, 그 지역 사회로, 결국 조선 전체로 확산되어 조선은 가난한 국가로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 경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할 수만은 없기에 복합적인 고려가 있어야 한다.
나라를 잘못 운영한 책임은 대부분 왕과 관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원경제지>는 책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이 영역은 다루지 않기로 했다.
<임원경제지>는 바로 이런 유식자, 즉 백수 선비들을 위한 책이다.
백수 계몽서이자 삶의 현장에서 당장 적용 가능한 실용서였다.
백수를 위한 이 책은 크게 ‘먹고사는 방도’와 ‘뜻을 기르는 방도’ 이 두 가지를 다뤘다.
먹고사는 방도는 달리 말하면 식(食)?의(衣)?주(住)의 영역이다.
이를 <임원경제지>에서는 ‘식력(食力)’이라 표현했다.
자기 몸을 움직여 힘을 쓰고 땀을 흘림으로써 먹고살 거리를 생산하는 분야인 것이다.
뜻을 기르는 방도는 지성인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마을윤리?문화예술 등의 영역이다.
이를 ‘양지(養志)’라 일컬었다.
사람은 먹고사는 데서만 만족할 수 없기에 고차원적인 교양을 기르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면서 정신을 수양하며, 공동체 사회에서 평화롭
게 사는 데 필요한 분야가 바로 양지인 것이다.


<임용경제지> 서문 표지. (일본 오사카부립도서관)


이 두 가지 큰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임원경제지>는 크게 16개 분야를 주제로 채택했다.
16개 분야 각각은 모두 전문 분야이면서, 독립적인 책이 될 만큼 내적 완결성이 높다.
16개의 분야(이를 ‘지(志)’라 한다)를 모았다는 뜻에서 <임원경제지>를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라고도 한다.
글자 수는 252만여 자(대략 15,000자인 <논어>의 약 160여 배)이며, 표제어만도 28,000여 개나 된다.
한마디로 방대한 책이라는 정도만 알아두시면 되겠다.
그럼 이런 책을 누가 썼단 말인가.
방대한 책을 혼자 쓸 수는 없을 테니, 몇 명이 지었단 말인가.
프랑스의 <백과전서(百科全書, Encyclopedie)>는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년)와 달랑베르(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
1717~1783년) 같은 대표 편집자를 위시하여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등 쟁쟁한 인물이 143명이나 참여했다는데….
지난 호에서의 권유로 검색을 이미 해보신 분도 있겠지만, <임원경제지>는 서유구(徐有?)라는 사람의 단독 저술이다.
처음 들어보신 분들도 많으리라.
이름만 들어보신 분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국민 대부분은 서유구를 모른다.
나중에 따로 저자 서유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테니, 우선 지금은 간략하게만 소개한다.
서유구는 조선 후기에 가장 잘나가는 가문 중 하나였던 대구 서 씨(달성 서 씨의 분파) 출신이다.
영조 때 태어나서(1764년) 헌종 때 세상을 떠났다(1845년).
생몰년으로 보면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스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과 활동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학자군을 보통 ‘실학자’로 통칭하는데, 서유구도 그 속에 들어간다.
실제로 서유구를 검색해보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라는 규정이 많이 보인다.



<임원경제지> 저자 서유구 초상화.


하지만 나는 조선 후기의 학문 활동의 경향을 실학이라는 용어를 통해 보려는 해석 방식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실학은 역사적 실체가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실학자라는 명칭도 맞지 않다.
서유구 역시 마찬가지다.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실학이나 실학자라는 개념을 버려야 한다.
실학자로 규정하지 않을수록 서유구라는 인물의 실체에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서유구는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규정한 적이 없다.
그는 오히려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는 표현을 종종 썼는데, 실학보다는 오히려 ‘이용후생학’이 그나마 임원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서유구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조선 후기의 저명한 학자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년)이나, 정약용 같은 학자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조정에서 국가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었거나, 정치권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서유구는 정승만 못 해보고 육조판서까지 두루 역임했고, 퇴임 후에도 조정의 원로로 대접받았다.
중앙과 지방의 고위 관료로서 33년간 국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인 것이다.
고위 공무원이었지만 조선 500년간 어느 누구도 만들지 못했던,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을 서유구라는 인물이 저술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임원경제지>에서 제시하는 ‘임원경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임원경제지>에는 ‘돈 버는 법’이 중요한 한 범주에 속해 있다.
앞에서 소개했던 <예규지>가 그것이다.
왜 돈 버는 법을 정리해야 했는지에 대해 그 취지를 설명하는 서문에서, 서유구는 장사를 비천한 일로 여기는 당시 지식인의 일반적인 관념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우리나라 선비가 스스로 고상하다고 표방하며 으레 장사를 비루하게 여긴 태도는 본래 그러했다.
그러나 궁벽한 시골에서 자신을 닦으며 가난하게 사는 무리가 많은데, 부모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도 알지 못하고 처자식이 아우성쳐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공손히 모으고 무릎 꿇고 앉아 성리(性理)를 고상하게 이야기한다.”
부모와 처자식이 가난으로 힘들게 사는데도 글만 읽으며 고상한 말만 한단다.
기시감이 들 정도로, 노가다도 장사도 못한다는 허생의 태도와 매일반이다.
이런 사람이 내 남편이라면 두드려 패주고 싶지 않은가.
이로도 맘을 고쳐먹지 않는 이런 사람은 요새 같으면 당장 이혼감이다.
<임원경제지>에서 내세웠던 ‘임원경제’는 지지리도 궁상맞게 살았던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나아가 생활 전선에 당장 뛰어들어 집안을 일으키도록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조선판 잘 먹고 잘사는 법이었던 것이다.
그 자극의 첫 번째는 농사였다.
이 세상 온갖 것을 통틀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것이 바로 밥이니까.
하지만 이 글에서는 농사 이야기를 잠시 미뤄두기로 한다.
우리 시대는 농사보다도 훨씬 더 중한 것들이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의 생각에 부합하고자 해서다.
그래서 이 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첫 번째 자극은 조선 선비와 전혀 연결되지 않을법한 장사 비법, 돈벌이 비법이다.
거의 모든 독자가 솔깃해할 임원경제의 비법을 다음회에서 공개한다.




필자소개 정명현
생명과학에 빠져 있다가 인문학에 눈을 떠 내친 김에 도올서원과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 여정을 통해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를 알게 됐다.
멋모르고 잡았는데 감당불가.
여러 인문학자들과 힘을 합치고는 있지만, 번역하느라 등골이 빠진다.
그래도 하나씩 알게 될 때 엄청 재밌고 놀랍다.
시민들이 새 희망의 빛을 이 책에서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게 돕고 싶다. 임원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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