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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너머의 물건들 - 잠옷 열네 벌

물건 너머의 물건들

글과 사진 전진우







잠옷 열네 벌


"잠복이라고 안 하고 왜 잠옷이라고 할까요? 수영복, 내복, 작업복이라고 하는데 말이에요.”
테이블에 마주 앉자마자 A는 그렇게 말했다.
대답은 찾을 마음 없이 가볍게 둥둥 떠다니는 질문.
하지만 어쩐지 A가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같았다.
잠옷이라면 잠잘 때 입는 옷이니까 누구든 입고 있다고 말해도 상관없지만, A가 말하는 잠옷은 어쩐지 그와 같은 단어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A를 통해 내게 잠옷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만나는 일

세어보니 열네 벌이 있네요.
처음 세어봤어요.
여름에 입는 반팔 파자마 세트 두 벌과 민소매 원피스 잠옷 한 벌, 계절에 상관없이 입는 파자마 세트 일곱 벌, 원피스 잠옷 두 벌, 겨울에 입는 극세사 재질의 파자마 세트 두 벌.
모아두고 보니 제법 되는군요.
4, 5년 전 처음 아래위 세트로 된 파자마를 샀던 것이 시작입니다.
그 뒤로 계절이 바뀔 때 몇 벌씩 더 사게 됐어요.
이렇게 많아진 것도 뭐 그때그때의 기분이었다고 해야할까요.
예전에는 따로 ‘잠옷’을 구입하진 않았어요.
낡은 맨투맨 티셔츠, 목이 늘어난 반팔 티셔츠, 그런 걸 집에서 입었죠.
그러다가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에 부쩍 관심이 높아진 시기가 있었어요.
아마 ‘B매거진’의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취향을 가지고 선택한 물건들로 주변을 꾸려나가는 일상의 근사함을 알게 되었어요.
이를테면 네 개를 묶음으로 사면 한 개를 더 주니까 사는 치약이나 하나 값에 두 개를 주는 샴푸 같은 것들에서 벗어난 거예요.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제 일상의 작은 부분들도 소중해지더라고요.
그런 경험이 잠옷을 ‘사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진회색 바탕에 흰색 가는 선이 체크무늬를 이루고 있는 파자마 세트를 그 무렵 사게 됐습니다.
처음 산 잠옷이었어요.




지금 이태원 쪽에 살고 있다고 하셨죠?
저는 20대 초반 학교 인근 한남동에서 자취를 했습니다.
지금이야 핫플레이스가 된 동네지만 10여 년 전쯤만 해도 평범한 주택가 동네였어요.
작은 슈퍼, 오래된 백반집, 대학생들이 떼로 가는 술집 등이 있는 그런 동네요.
그러다가 학교가 용인으로 이전을 한 뒤 학교 부지에는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고, 한남동 일대에는 지금과 같은 새로운 상권이 이루어졌어요.
2014년에는 제가 다니고 있던 회사가 논현동에서 한남동으로 사무실을 옮겨 왔는데요, 그렇게 저는 약 8년 만에 다시 한남동을 매일 오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학교 정문이었던 곳 바로 앞에 회사건물이 자리 잡아서 혼자 감회가 새로웠죠.
맞아요.
이 얘기도 잠옷 얘기예요.
조금 더 들어보세요.
그렇게 지내다 우연히 폐점 땡처리 행사를 하는 속옷 가게를 보게 된 거예요.
대학생 시절 간간이 양말이나 속옷 같은 걸 사곤 하던 가게였죠.
“혹시 잠옷 있나요?”
제가 묻자 빛바래고 먼지 쌓인 내복 상자들 사이에서 몇 개 꺼내주셨어요.
그중에 작은 리본이 달리고 밑단이 치마처럼 생긴 분홍색 잠옷들 속에서 발견한 남자 95 사이즈 잠옷이 마음에 들었어요.




흰 바탕에 남색 체크무늬가 큼직큼직하게 있는 잠옷이었습니다.
위는 셔츠처럼 생겼고 아래는 고무줄이 들어간 바지예요.
품도 넉넉하고 소재도 무난해서 입었을 때 제일 마음이 편한 잠옷이었어요.
무엇보다 그 속옷 가게가 제 20대와 30대가 교차하는 공간이었으니까 더욱 특별한 것 같습니다.
지금 그 BYC 가게 자리에는 뭐가 생겼을까 궁금해지네요.



숨길 수 없음

다른 옷들과 마찬가지로 입었을 때 잘 어울리는 것을 골라요.
거의 저만 보는 옷이긴 하지만요.(웃음)
딱 맞는 것보다는 하나 더 큰 사이즈를 사고요.
거의 아래위 한 벌인 형태가 많지만, 간혹 원피스 타입이 눈에 들어오면 너무 짧지 않은 것을 삽니다.
또 눕거나 앉아 있을 때 몸에 닿는 장식이 없는 것이 좋고요.
계절을 거쳐오면서 다양한 소재의 잠옷을 입어보니 통풍이 잘되는 면 소재가 좋았어요.
면도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탄탄하게 힘 있는 소재보다는 얇은 편이 더 좋았고요.
제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들은 다 제각각이지만 추천한다면 무난하게 무인양품을 꼽을게요.
또 요즘은 잠옷만 전문으로 내세우는 브랜드들도 많아요.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성장하는 비즈니스 영역 같아요.
국내 브랜드의 경우 조스라운지, 에탐, 애드로브 등이 있고요.
애드로브는 키즈라인도 따로 있어요.
해외 브랜드의 경우에는 슬리피존스요.
슬리피존스는 아직 위시리스트에 있긴 합니다.
그런데 잠깐만요.
제가 지금 너무 유난스러워 보이나요?
조금 만회를 해보자면, 제가 꼭 잠옷을 입어야 잠을 잘 자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라서 잠옷이 없는 상황이 별 문제 되지는 않아요.
친구네 집에서 잘 때는 보통 친구가 내어준 옷을 입고요.
술을 마시다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잠들 때도 많지요.
그런데 사실 여행을 갈 때는 따로 잠옷을 챙겨 가기도 해요.
예전에 친구들과 후쿠오카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땐 잠옷을 챙겨 온 게 왠지 유난인 것 같고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첫날은 바지만 입고 위에는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어요.
그러다 다음 날엔 그냥 아래위 세트로 입었어요.
역시 무척 좋았습니다.





잠옷의 기분

매일 아침, 일어나서 바로 씻으러 갈 수도 있지만 저는 누운 자리를 한 번 정돈하고 욕실로 가요.
다음으로 확실히 넘어가는 기분이랄까….
그런 것처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마치 작은 의식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금 거창한 표현이지만 바깥에서 보낸 시간을 분리하고 안에서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요?
혼자 있는 시간과 혼자 머무는 공간이지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꼴은 싫다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물론 흐트러진 때도 무척 많음’ 이렇게 적어줄 수 있나요?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요?
물론 있죠.
아까 말한 것처럼,
‘아, 집이다’라는 기분이 들어요. 잠옷을 입으면요. 맨발로 바닥을 딛고 서서 잠옷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는 느낌이 좋아요. 한 번 상상해보세요.(웃음)



필자소개 전진우
대학에서 체육과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졸업 후 2년간 에디터 생활을 했다.
오래 지냈던 경기도 의정부에 친구와 가족이 모두 있어서 항상 생각이 그리로 흐르는 편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체험한 주변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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