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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한의 시간을 듣는 남자 - 항상 엔진을 켜둘게

원대한의 시간을 듣는 남자

글과 그림 원대한







항상 엔진을 켜둘게



민철은 고등학교 때 같이 미술을 배우던 친구다.
그의 독특한 발상과 표현이 담긴 작업을 좋아했다.
키우는 도마뱀을 보여준다며 나를 집에 부르고, 포켓몬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며 포켓몬스터 게임을 하다가 한국 챔피언이 되고, 사생대회 때는 펜촉으로만 풍경을 그리다가 완성 못하고 웃기만 하던 친구.
대학에 가고 나서도 종종 만나서는, 걷다가 모르는 바에 불쑥 들어가서 술을 마시곤 했다.
하지만 민철이 일본으로 떠난 후 우리의 취미 하나가 사라졌다.
나도 곧 도쿄에 종종 가게 되었지만, 야근이 많은 민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일 년, 급한 일로 도쿄에 갔다가 민철에게 문자를 남겼다.
주말에도 출근했던 그가 퇴근 후 내 쪽으로 왔다.
앉더니 무턱대고 외롭단다.
감정표현을 잘하지 않던 그의 말에 놀랐다.
꽤 성공한 디자이너가 되었으니 외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나를 넘겨짚고 평가하는 데에 지친 내가 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날 긴 시간을 이야기 나눴고, 그달이 가기 전 다시 또 만나서는 처음 보는 바에 들어갔다.
잊고 있던 우리의 취미와 함께 지레 생략하고 삼켜왔던 말들을 다시 꺼냈다.
잘 사는 척 치워놨던 내 우울을, 커리어에 숨겨졌던 친구의 외로움을 함께 꺼내 널었다.
다음 날 오전, 자주 가던 공원을 걸었다.
공원 안의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인큐베이터 온도가 이럴까 싶어 한참을 걸었다.
저녁, 빈 게이트에 한참을 앉았다가 숨을 깊게 내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긴 줄에 합류했다.
처음 겪는 깊은 우울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이 봄에는 내 감정에 더 솔직해지기를, 숨기지 말고 말하고 또 들어주기를, 그리고 잠시 서울에 들어올 민철과 모르는 바에 무턱대고 들어갈 수 있기를.




리스파이스 <항상 엔진을 켜둘께>
2001년 발매된 델리스파이스의 정규앨범 수록곡.
반복적으로 나오는 ‘언제라도 출발 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두겠다는’ 가사가 큰 힘이 될 때가 있었다.
그리고 민철과 처음으로 같이 갔던 홍대의 작은 바에서 흘러나온 노래이기도 하다.
그날 처음으로 마셨던 상그리아를 떠올리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민철과 다시 이 노래를 듣는다.






필자소개 원대한
그래픽디자이너.
느리게 작업을 하면서 때때로 여행을 다니곤 한다.
책 <엄마는 산티아고>와 <그날 오후의 커피>를 썼다.
오래오래 듣고 보고 부르고 연주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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