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투데이

문화
count
2,484
살아 있는 부엌 - 냉장고 없는 사람의 부엌을 꿈꾸다

살아 있는 부엌

글과 사진 류지현





냉장고 없는 사람의 부엌을 꿈꾸다


며칠째 미루던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왔다.
감자는 빛이 닿지 않는 부엌 서랍 안쪽 바구니에 넣고, 양파는 통풍이 잘 되도록 망째로 대롱대롱 매달아놓는다.
바쁠 때 후다닥 구워 먹을 스테이크용 쇠고기안심은 온도가 제일 낮은 냉장고 아래 선반에 집어넣는다.
양배추를 담아둘 접시에 물을 붓고 있는데 신랑이 들어왔다.
이런 어쩌나.
그의 손에도 장바구니가 들려 있다.
텅 비어가던 부엌에 갑자기 온갖 식재료가 넘쳐난다.
구석구석 자리를 찾아 장바구니 두 개에 가득했던 식재료를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열두 구짜리 달걀 두 판.
이 많은 걸 어떻게 해야 한담.
달걀이 많이 들어가는 토르티야(Tortilla de patatas: 감자를 넣어 케이크처럼 두껍게 부쳐 먹는 스페인식 오믈렛)를 만들려다 프라이팬만큼 큰 오믈렛을 둘이 언제 다 먹나 싶었다.
요리 검색을 한참 더 하다가 간단한 해결책을 발견했다.
달걀 장조림!


쇠고기 장조림으로 많이 알려진 달걀 장조림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식재료를 좀 더 오래 두고 먹기 위해 고안해낸 보관 방식이자 요리법이다.
시래기와 같은 말린 나물부터 각종 김치류와 장아찌 등 한국 전통 식문화에서 보관이나 저장을 위한 요리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먹을 것이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생존을 위해 식재료를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낭비 없이 이용해야만 했다.
그 노력은 집집마다 오랜 시간을 거쳐 음식 보관 지식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왔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혼수로 꼭 찬장을 장만했다고 한다.
찬장은 그릇이나 음식물을 보관하는 부엌 가구다.
그때는 냉장고가 없거나 있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간장에 조린 전은 찬장 안에서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었고, 멸치볶음이나 콩장 등은 그 안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행여 금방 상하는 반찬을 만들게 되면 남기지 않고 다 먹으면 되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어떤 찬이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지, 버리지 않기 위해 양은 얼마나 해야 하는지를 꼼꼼히 따져 식단을 구성했다.
지금은 냉장고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큰일이 날 것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다.
냉장고가 없는 동안 인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냉장고의 등장으로 부엌 손에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더 잘 먹고 있는 것일까?
아니, 예전만큼이나 잘 먹고 있는 것일까?


냉장고를 지나치게 맹신하는 생활 습관은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와 환경에서도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보관하느라 24시간 전력을 소모하고 있으며,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도 그 속에 꼭꼭 숨겨둔 식재료들은 썩어나간다.
저마다 사는 환경이 다르니 모두가 냉장고를 멀리할 수야 없겠지만 여러 세대에 걸쳐 쌓여온 지식의 도움으로 냉장고를 보다 현명하고 적절하게 사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냉장고가 우리 생활에 등장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꽤 근래의 일이다.
세계 최초의 가정용 전기냉장고는 1910년대에 등장했으며 한국산 냉장고는 1960년대나 돼서야 생산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냉장고가 생활필수품이지만 시간상으로 보자면 냉장고 없는 생활이 인류에게 더욱 익숙할 법하다.
음식 저장문화는 인류의 역사와 같이해왔으므로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여왔을 수많은 지혜가 얼마나 방대할지 헤아리
기조차 어렵다.


지금은 집을 지을 때 냉장고 자리를 고려해서 부엌을 설계하지만 냉장고가 없던 시절 가정집에는 대개 음식물 전용 찬장이나 곳간이 있었다.
곳간은 집의 북쪽에 두어 햇볕을 최대한 피하도록 했으며, 찬장의 경우 특별히 통풍이 잘되는 재료로 만들고는 했다.
나라에 따라서는 이중창의 창 사이 공간에 음식 찬장을 제작해서 쓰기도 했고, 개미 등 벌레들이 음식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찬장 다리 밑에 물을 담은 접시를 놓기도 했다.
요즘에는 문제가 생기면 그에 맞는 기술을 개발해 해결하려 드는데 과거에는 주어진 환경 안에서 관찰과 경험을 통해 쌓인 지혜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바람을 가르는 갑판 위에서 지지 않는 해를 벗 삼아 자랐을 핀란드의 티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녀는 어린 시절에 달걀은 냉장고 없이 보관할 수 있는 든든한 식재료중 하나라는 걸 배웠다.
“어렸을 때 배를 타고 긴 여행을 많이 했어요.
배에서 컸다고 할 수 있죠.
부모님은 달걀에 바셀린을 발라서 달걀 상자에 넣어 가져갔어요.
매주 그 달걀 상자를 한 번씩 뒤집어 줬고요.
그래야 노른자가 아래에 가라앉지 않는다고요.
그렇게 몇 달이고 문제없이 달걀을 먹었다니까요.”
달걀은 나라마다 규정이 달라 한국에서는 냉장과 선반 판매를 병행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냉장 판매, 유럽에서는 선반 판매를 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가정에서도 냉장고에 보관하는 달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제 많은 이들이 식재료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슈퍼에서는 달걀을 선반에 두고 파는데 집에 오면 냉장고에 넣어요.
어디다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냉장고에 달걀 넣는 구멍 있잖아요.
그냥 거기에 두는거죠."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부엌과 곳간, 마당 곳곳에서 알아낸 식재료에 대한 이해와 보관 지식은 냉장고를 만나 갈 곳을 잃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의 관리를 냉장고라는 기계에 완전히 맡겨버렸다.
냉장고 문 넘어 어떤 식재료가 얼마나 오랫동안 먹을거리로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지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그사이 먹지도 않고 냉장고 안에서 썩혀 버리는 음식물은 쌓여가고 우리의 식문화는 그 풍요로움의 한 축을 잃어가고 있다.




냉장고라는 물건이 일상생활에 들어오면서 식생활, 나아가 삶 자체가 크게 변해왔다.
‘그 변화를 개선할 수 있는 다른 물건이 있다면 또 다른 사회의 모습을 꾀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가 시작한 프로젝트가 바로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Save food from the fridge)>다.
냉장고에 꼭 보관하지 않아도 괜찮은 식재료들, 혹은 보관하면 안 되는 식재료들을 알리고, 그 식재료를 보관하는 방법을 냉장고 가 없던 시절을 살았던 이들에게 배워 알리고자 한다.
작업실에서는 그 지식에 형태를 입히는 데 바쁘다면 작업실 밖에서는 냉장고 없이 사는 혹은 살아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지식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는데 사람과 삶을 만났다.
진정한 지식은 직선문답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겹겹이 쌓인 삶의 한복판에서 구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일상 속 자연을 품고 있는 그들의 삶에서 지속 가능한 삶의 희망을 보았다.
그들의 부엌은 신기하게도 어린 시절 기억 속 엄마와 할머니의 부엌과도 닮아 있었다.
독자들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을 통해 낯선 문화에서 자신을 만나고 과거에서 미래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류지현
류지현은 그가 거주하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페루, 쿠바, 베네수엘라 등 남미의 다양한 부엌을 방문해왔다.
지면 관계상 다할 수 없는 긴 이야기는 단행본 <사람의 부엌>에 담았으며, 향후 월간 <해피투데이>를 통해서는 책에서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더 많은 정보는 savefoodfromthefridge.com에서 찾을 수 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