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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예술산책1 - 일상에 스며든 예술

동유럽 예술산책 ①

글과 사진 박진숙






일상에 스며든 예술


프라하, 체스키 크룸로프, 그라츠, 류블랴나, 블레드, 자그레브, 자다르


1 성벽에서 바라본 체스키 크룸로프의 시내 전경.
2 자다르의 노바리바에서 본 노을.


‘올해엔 어디를 갈까?’ 매년 9월이 다가오면 고민에 빠진다.
1년에 한 달, 가족여행을 어디로 갈지 정해 항공권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고민이 더욱 깊어졌더랬다.
결혼한 지 20주년 되는 해를 의미 있게 보내려면 어디가 좋을지 고르고 고르다 동유럽으로 낙찰을 봤다.
일부러 여행계획을 거의 짜지 않고 프라하로 향했다.
하나, 체코에서 시작해 체코로 마친다.
둘,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셋, 한 도시에 최소 3일 이상 머무른다.
넷, 웬만하면 싸우지 말자.
이 정도 원칙만 정하고 여행을 시작했다.
한 달짜리 여행의 계획을 너무 타이트하게 세우면 스릴이 떨어지고, 계획대로 안 됐을 경우 괜히 불안해서 여행파트너와 다투기 마련이다.
프라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수많은 영화와 광고의 배경이 된 카를교는 언제 봐도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다만 사람에 치여 그 아름다움을 맘껏 누리지 못한다는 게 흠이었다.
시내 어디를 가도 관광객들로 넘쳐나 숨을 곳이 필요했다. JC(남편의 애칭)와 내
게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준 곳은 다름 아닌 ‘서점’이었다.
프라하의 셰익스피어 서점에는 고전들로 가득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초롬하게 열혈 독자를 기다리는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이 사랑스러웠다.
두 번째로 선택한 도시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에서 사람에 치여 느끼게 된 허탈감을 메워주기에 충분했다.
체코 남부에 위치한 체스키 크룸로프 시내에 들어서자 ‘우와’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도시 자체가 동화의 한 장면이었다.
산비탈을 타고 층층이 세워진 형형색색의 건물들, 도시 한가운데를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물, 그 위로 무심하게 걸쳐진 다리가 비현실적으로 펼쳐졌다.
좁다랗게 구부러진 골목에서 뾰족 모자를 쓴 난쟁이들이 불쑥 나올 것만 같았다.
360도 어디에 대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그대로 엽서가 됐다.


3 류블랴나에선 저녁이면 강을 따라 낭만이 켜졌다.
4 블레드 호수.


게다가 체스키 크룸로프는 무려 에곤 실레의 숨결이 어린 곳이었다.
실레는 엄마의 고향에 내려와 몇 년간 머물며 도시의 풍경을 특유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다.
에곤 실레미술관에 가니 실레의 소지품과 친필 편지, 사랑했던 여인과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막상 원화 작품들이 거의 없어 실망스러웠으나 스물여덟 살이라는 짧은 생애를 격정적으로 살다 간 실레의 인간적인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체코에서 남동쪽으로 6시간 반을 달려 그라츠에 다다랐다.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크지만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그라츠는 알고 보니 2003년에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된 바 있다고 했다. 이름도 낯설었던 도시였는데 3일 지내는 동안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그라츠는 고전미와 세련미를 두루 갖춘 두 얼굴의 도시였다.
이방인을 처음 맞아준 그라츠역은 마치 우주선이 내려앉은 듯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명물로 꼽히는 현대미술관인 쿤스트하우스(Kunsthaus)는 흡사 해삼을 닮은 외계생명체 같았다.
반면 구시가지는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됐다고 할 만큼 수백 년이 넘은 건물들이 웅장함과 세밀함을 동시에 뿜어냈다.
고딕에서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에 이르기까지 건축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도시를 좌우로 가르는 해발 473m의 작은 산슐로스베르크에 올라가니 붉은 지붕을 맞대고 오밀조밀 모여 있는 역사적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잘 간직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하고 절감했다.
그라츠에서 받은 감동을 간직한 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로 향했다.
나라 이름도 도시 이름도 생소하지만 몇 년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블레드 호수 사진 한 장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블레드를 가기 위해 우선 류블랴나에 짐을 풀었다.
한밤중에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헤맨 탓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우리를 집주인 마레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라디오 DJ로 꽤나 목소리가 알려진 마레도 블레드는 꼭 가보라고 추천해주었다.
하늘이 물이 되고, 물이 하늘이 되는 블레드 호수는 그 자체로 자연이 만든 걸작이었다.
설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 블레드는 류블랴나에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다.


5 체스키 크룸로프에선 장작마저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6 프라하의 셰익스피어 서점 입구.


처음엔 유명 사진가가 찍은 사진에 실물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살짝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JC와 2시간 남짓 호숫가를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동안 실망감은 충만함으로 바뀌었다.
걸으며 만난 수백 년 묵은 나무,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들, 호수전체를 휘감는 교회의 종소리가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풍경화 속 작은 피사체가 될 수 있어 영광이다 싶었다.
마레가 소박한 도시라고 표현했을 만큼 류블랴나에는 이렇다 할 유명한 건축물이나 박물관이 없었다.
사흘 밤낮으로 걸으면서 보니 역설적으로 류블랴나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했다.
용의 다리, 사랑의 다리(Butcher’s Bridge의 별명), 트리플 다리, 코블러의 다리 등 류블랴니차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는 이야기가 넘쳤다.
다리 곳곳을 장식하는 조각들과 무수한 자물쇠에는 사랑과 용기, 슬픔의 신화들이 담겨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가우디가 있다면 류블랴나에는 요제 플레츠니크가 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건축가 한 사람이 도시 전체를 이렇게 세심하게 조율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부럽기까지 했다.
아름답고 인심도 후한 슬로베니아에서 1년쯤 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다음 여행지로 떠나야 했다.


7 셰익스피어 서점 안의 고전들은 새 옷(?)을 입고 진열돼 있었다.
8 프라하는 골목골목마다 예술과 유머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꽃다운 누나들이 다녀가 유명해진 크로아티아에서 우리가 고른 도시는 자그레브와 자다르였다.
너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자그레브는 그냥 도시였다.
다행히도 별 기대 없이 들어간 민속박물관에서 동유럽의 화풍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이반 제네랄릭(Ivan Generalic, 1914-1992)이라는 화가의 음울한 듯 강렬한 선과 색에서 동유럽의 정서가 느껴졌다. 
민속화가들에게 작은 감동을 받은 걸 제외하면 라는 디저트 카페가 제일 인상적일 정도로 시시했다.
그런데 자다르는 예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아드리아 해안의 항구도시 자다르는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 있었다.
겨울비가 부슬거리는 오후, 늦은 점심도 먹을 겸 자다르구시가지로 향했다.
신시가지를 내려와 다리를 하나 건넜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무려 BC 9세기에 기초가 다져진 도시인만큼 3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의 위엄을 풍겼다.
식당이나 카페를 찾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로마시대 유적을 마주칠 수 있으니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JC와 항구로 향했다.
바닷가를 따라 1km 넘게 이어진 산책길 노바 리바는 1874년에 전쟁으로 성벽이 무너진 후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했다.
픈 역사를 간직해서인지 산책하며 바라본 저녁노을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걸출한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라고 감탄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먹구름이 걷히는 하늘에 갈매기가 붉은 빛을 배경으로 날고, 외투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파도 위로 일렁였다.
멀리 반대편 도시에 등이 하나둘 들어오자 어선들이 하나둘 귀가를 재촉하고 있었다.
산책길 끝에 다다를 무렵, 어디선가 오르간 선율이 들려왔다.
물기를 머금은 저녁공기 때문인지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멜로디처럼 음산하고 오묘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도 오르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연주자는 놀랍게도 바닷물이었다.
산책길 위에 뚫린 여러 개의 구멍 아래로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곡이 탄생하고 있었다.
바다가 작곡자요, 연주자인 셈이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바다 오르간(Sea Organ)’ 연주에 취해 한동안 석양을 바라보았다.






필자소개 박진숙
시민단체 <에코팜므> 대표, 작가, 인권교육 강사 등 하는 일이 많다.
스스로 ‘다품종 소량 생산’ 인생이라 칭하며 살아간다.
돈 모으는 족족 여행에 탕진하는 터라 여행 가이드를 직업란에 추가하려고 궁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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