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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의 맛동산 - 뻐근한 위장을 뜨끈하게 달래주는 닭곰탕

김하늘의 맛동산

글과 사진 김하늘







뻐근한 위장을
뜨끈하게 달래주는 닭곰탕


바다를 보고 싶다. 자동차 핸들을 돌리거나 대중교통 티켓을 끊으며 애를 쓰지 않아도 바다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날 바다마을에 사는 친구에게 물었다. 혹시 바다를 곁에 두고 살아서 그토록 마음이 넓은 거냐
고. 살아갈수록 내 마음은 바위에서 자갈로, 자갈에서 모래로 닳고 닳아 작아져만 가는데, 너는 어떻게 늘 그
렇게 내게 넓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냐고 말이다. 제주에 왔다. 바다가 보이니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며칠의 일정을 테트리스하듯 당기고 겨우 끼워 넣어 연일간 여백을 만들었다.
봄바다를 눈에 넣을 생각에 마음은 부풀어 오른다.
집에서 몇 걸음 걸어 공항철도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 이윽고 제주에 도착했다. 
고작 90여 분 걸려 제주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편리한 행운이다.
부리나케 <진영식당>으로 향했다.
창도름(돼지막창)이 듬뿍 들어간 순댓국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다.
특유의 돼지 누린내조차 신선하다.
제주에 올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다.
다른 집은 갈 생각도 않는다.
이미 인이 박힌 이곳을 두고 굳이 새로운 집을 찾아 루틴처럼 박힌 경로를 달리하고 싶지 않다.
제주 막걸리까지 상에 오르자 마치 이 근방에서 벽돌이라도 나르다 온 인부처럼 게걸스럽게 한 그릇을 비우고
부지런히 떠날 채비를 한다.


비가 내린다.
‘내일 하늘은 개었으면’ 바라고 바라다 어느새 협재에 닿았다.
숙소 예약은 따로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부지런을 떨고 싶지 않다.
골목을 따라 걷다가 건물 외벽에 그려진 파란 고래 한 마리와 마주쳤다.
<쫄깃센타>라고 쓰인 간판이 발걸음을 쫄깃하게 잡아 당겼다.
현관은 이미 많은 신발로 붐벼 있다.
무턱대고 들어가 ‘남은방이 있냐’ 묻고, 곧바로 도미토리룸에서 이틀 밤을 묵기로 했다.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세 개의 이층침대가 있는 여대생 기숙사 A동에 짐을 풀고 거실로 나왔다.
창밖엔 여전히 회색 비가 내린다.
파도는 갈퀴를 넓혀 거칠게 몰아친다.
벤치에 홈웨어 차림으로 책을 읽는 여자, 저녁메뉴로 두부조림을 하겠다며 기름에 두부를 지지는 남자, 기타 줄을 튕기는 남자.
뒤숭숭한 밖과 달리 모두 남의 시선 따위 개의치 않고 온전히 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며 책장을 둘러보다가 벤치에 걸터앉았다.
책을 보던 그 여자가 말했다.
“내일은 맑을 거예요.”


새 학년의 시작은 늘 곤혹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늘 멋쩍어했다.
친구를 사귀는 공식이 있다면 잘 풀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세상 필요 없는 근의 공식만 줄줄 외우다 어른이 됐다.
어쩌면 새로움이라는 것의 불편함과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늘 같은 식당에서 순댓국을 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내게 게스트하우스는 더욱이 난감하고 곤란한 곳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공간을 공유해야 하는 난제 같은 곳.
그런 곳에서 내일은 맑을거라는 무지개 같은 한마디에 긴장이 풀렸다.
나만 부둥켜안고 있던 팔짱을 가만히 해제시키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한두 마디 말을 섞다가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날수록 친구들은 하나 둘 늘었고, 여정을 공유하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다 같이 월정리를 경유하기로 마음을 맞췄다.
그날 밤 여대생 기숙사 A방의 세 여자는 별을 보듯 누워 한참 수다를 떨다 잠이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비가 그쳤다.
맑다.
며칠 밤 비양도는 파도를 옴팡 뒤집어썼는지, 소금물에 데친 브로콜리처럼 또렷한 초록색을 자랑한다.
어렴풋한 푸른색의 바닷물을 한 움큼 떠먹으면 달콤한 캔디바 맛이 날 것만 같다.
더없이 경쾌한 협재의 표정을 마음에 새기고 친구들과 월정리로 향했다.
월정리는 쉼 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유원지와 별 다를 것없이 관광용 식당과 카페들이 즐비하다.
한참을 고르고 고르다 동네 할아버지 꽁무니를 쫓아 <월정곰닭>에 당도했다.
의자 탁자가 단출하게 들어와 앉아 있었고 여자 주인 혼자 식당을 지키고 있었다.
이 집의 메뉴는 닭곰탕과 닭칼국수.
여름엔 초계국수, 겨울엔 닭개장을 낸다.
나무쟁반에 김치와 장아찌와 함께 올린 닭곰탕을 보니 과연 드디어 밥을 먹는가 싶었다.
아침도 굶고 정오를 넘기고 뻐근한 위장으로 뜨끈한 닭국물을 내려보내니 속이 우르르하고 풀린다.




그렇게 한참 코를 박고 먹다가 허기가 사라질 때쯤 일행 중 한 명이 소주 한 병을 꺼내왔다.
작정하고 팀을 꾸려서 왔으니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주인은 국물이나 고기가 부족하면 더 주겠다며 한껏 더 반주를 부추겼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인도 어느새 왁자하게 우리와 한 팀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주인은 인디밴드 허클베리핀의 매니저 일을 하다가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를 하게 됐고, 이제는 가수 스왈
로우의 키보드 세션을 겸하는 뮤지션이었던 것.
허클베리핀의 보컬 이소영과 함께 동거를 하며 닭개장을 줄곧 끓여 먹다가 닭곰탕집을 차리게 됐다고 했다.
몇 달을 걸쳐 농가주택 옆에 달린 창고를 개조해 가게를 완성했다.
매일같이 옆 마을에서 닭을 잡아 국물을 우리고 고기를 찢는다.
주민들과 관광객이 반반씩 왔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에겐 특별한 익숙함으로, 누군가에겐 익숙한 특별함을 주는 식당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닭곰탕은 특별할 것까지는 없다.
제주라는 여행지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도 아니다.
지만 온통 관광객들을 겨냥한 식당으로 가득한 동네에서 이런 평범함은 오히려 반갑다.
거기에 고집스러운 정성과 살가운 배려가 깃들어 있으면 더욱이 그렇다.
곰탕 한 그릇을 비우고 나오며 우리는 또 다른 만남을 기약했다.
그리고 한참 바다를 바라봤다.


월정곰닭
주소 제주 제주시 구좌읍 월정1길 70-5
영업시간 매일 오전 8시~오후 4시(수요일 휴무)



필자소개 김하늘
외식브랜드 컨설팅 회사 <브랜드테일러스>에서 음식 브랜드 창업과 운영에 관한 다양한 기획을 하며 먹고 산다.
식당의 이름을 짓거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동선을 설계하는 등의 일이다.
유행에 반짝하는 카페보다 오래도록 거기에 있는 백반집을 더 아낀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것을 좋아한다.
경험하고 느끼고 말하는 식사 모임 ‘飯嘗會(반상회)’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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